25년전 4월30일. 분단된 남북 베트남이 당시 월남의 수도 사이공함락과 함께 통일을 이룬 날이다. 미국의 패전으로 기록된 이날 한국도 월맹군의 사이공 진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한국은 1964년 9월부터 꼭 3,097일 동안 ‘평화의 십자군’이란 이름으로 31만여명의 국군을 파병, 5,000여명이 전사하고 수만명이 부상했던 희생을 치러야 했다. 지금까지 고엽제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참전용사들도 많다. 그러나 참전용사들의 기억에 선명한 이 전쟁이 우리에게 ‘잊혀진 전쟁’이 돼 있다.
공산화한 베트남은 이후 사이공을 호치민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스스로 이루어 낸 통일의 자부심과 자본주의를 배워 경제를 도약시키려는 열성으로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정작 문제는 우리쪽에 남아 있다. 유해수습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사자파악이 깨끗하지 못했다. 미흡한 전후처리는 미결의 우리 과거사이다.
30도가 넘는 찌는 듯한 더위속에서 정글을 헤치고 찾아간 베트남 중부 퀴뇬시. 이 도시 외곽지역은 맹호부대(수도사단) 주둔지였다.
지금은 베트남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 일대에는 아직도 당시의 격전을 말해 주듯 포탄의 파편 등이 널브러져 있다. 이곳에서 약 30㎞ 떨어진 조그만 마을인 안년군에는 맹호부대원들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월맹군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 추모비에는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앙케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20여명의 이름이 월맹군 전사자 명단 사이에 ‘무명의 전사자’로 함께 기록돼 있다.
현지주민들은 이 전사자들이 한국군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 군이 참전용사들의 유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름 모를 정글의 한 구석에 방치됐을 유해들이 또 있지는 않을까.
이는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국군의 정확한 숫자가 얼마나 될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국방부는 지금까지 여러차례 국군 ‘손실통계’를 발표했 었다.
그러나 그 통계는 그때마다 숫자가 달랐다. 1973년 철군 당시 국군은 전사자(전투중 사망) 수를 3,844명으로 발표했으나 20여년후인 1994년에는 그 수가 4,650명으로 늘어나 있다. 국방부는 모든 전사자 유해를 송환, 국립묘지에 안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격전지의 무명 전사자비는 우리 정부 통계의 신뢰성에 의문을 낳는다.
우리 정부는 베트남이 공산화했고 그동안 외교관계도 없었는 데다 적대국이었다는 이유 등으로 베트남 정부에 국군 유해문제를 한번도 제기하지 않았다.
하노이 주재 미국 실종자(MIA) 사무소 책임자 프랭클린 F 차일드리스 중령은 “지금껏 59차례에 걸친 유해 발굴과정에서 총 307구의 미군 추정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했으나 270구는 미확인 상태로 남아 있다’”면서 “그동안 일본 호주 프랑스 등에서는 유해확인을 요구, 4구를 찾아갔으나 한국은 협조요청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군의 실종자(MIA)·포로(POW)가 있을 개연성이 높다고 말한다. 실제로 미국 국방부 문서와 참전용사들의 증언은 민간인을 포함한 상당수의 MIA와 POW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호치민=이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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