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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따이한](1-2) 수습못한 국군유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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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따이한](1-2) 수습못한 국군유해 없나

입력
2000.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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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베트남 중부 퀴논 서쪽 60㎞ 지점에 위치한 앙케 638고지. 맹호부대가 1972년 4월18일부터 5월15일까지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되찾은 이 고지의 산등성이에는 아직도 전흔이 남아있다.국군이 만든 추모비 계단은 만 28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다. 시멘트 틈사이엔 이름모를 한송이 붉은 꽃이 함초롬히 피어 당시의 전투를 기억하는 듯하다.

이곳으로부터 20여㎞ 떨어진 안년군의 전쟁추모비에는 그때 숨진 ‘월맹군’ 추모비가 있다. 빼곡히 적힌 전사자들의 이름을 보면 치열했던 당시 상황이 다시 떠오르는 듯하다.

이어지는 월맹군 전사자의 이름들 사이에 검은 줄들이 그 행렬을 간간이 끊고 있다. 검은 줄들은 유해는 있되 신원을 모르는 ‘무명씨 전사자’들이다.

동행한 베트남인은 “이 추모비는 앙케 전투에서 숨진 군인들을 집단매장한 후 마련됐다”면서 “무명의 전사자들은 당시 신원파악이 불가능했던 ‘따이한(大韓)’군”이라고 설명했다.

3,4년전 이곳을 찾은 재베트남 동포 정주섭(65)씨는 “수백명의 월맹군 명단 사이에 있는 20여명의 무명용사는 한국군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언젠가 지역 당간부는 ‘인간은 죽은 후에는 적과 아군이 따로 없다’고 말하면서 함께 명복을 빌자고 권했다”고 말했다.

퀴논시 골동품점에는 아직도 국군의 인식표가 나돌곤 한다. 이날 어렵사리 입수한 한 인식표에는 김모라는 성명과 군번 120470○○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베트남 상인은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군 참전용사들이 기념으로 인식표를 구입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면서 “따이한 병사가 작전중 인식표를 분실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전사자 수습 과정에서 유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 인식표는 생명과 동일시돼 왔다.

국방부는 지금껏 베트남 전쟁과 관련 ‘단 1구의 유기된 유해나 실종·포로는 없다’고 공언해왔다. 국군은 유해수습이 최고의 전투방침이었으며, 특히 독자적인 공중작전이 없었던데다 작전통제지역 안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이 문제는 1992년 베트남과의 수교과정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참전 용사들의 증언과 관련 기록을 보면 국방부 주장에 의문의 소지가 많음을 발견할 수 있다. 국군은 미군에 비해 직접적인 교전은 적었으나 만 8년의 참전기간 동안 7,000㎦에 이르는 책임지역에서 대부대 작전 1,174회 등 총 57만7,476회에 걸친 작전을 펼쳤다.

소규모 전투가 주종을 이뤘으나 전투규모·기간 등을 고려하면 국방부 주장대로 ‘100% 유해 수습’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해처리 과정도 전쟁이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성조기를 둘러친 알루미늄관에 시체를 넣어 송환했던 미국과는 달리 국군은 1970년대초 전황이 급박해지자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 놓고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화장한 후 전사통보를 하고 국립묘지에 유골함을 묻는경우도 많았다.

참전용사 김모(57)씨는 “당시 나트랑 소재 100군수사령부 영현중대 등에서 화장처리를 했다”면서 “유해의 일부가 유실된 경우 나무로 채워 화장하는 등 완벽을 기했지만, 종종 시체는 10구인데 전사명단에는 1,2구씩 추가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청룡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던 이모씨는 “전사자 유해를 찾기 위해 대대병력이 동원됐으나 발견하지 못한 경우가 2차례 있었다”면서 “특히 전과를 올리기 위해 베트콩을 추적하다 오히려 유인돼 고립, 실종된 전우들이 나중에 보니 전사처리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맹호부대의 유종철(劉鍾鐵) 일병은 앙케 전투에 투입됐다 11개월간의 포로생활후 1973년 3월27일 귀국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그는 이미 전사자로 처리돼 있엇다.

유씨는 당시 ‘살아온 전사자’로 화제를 일으켰다. 또 1967년 9월 다낭 주둔 청룡부대 소속의 초소가 홍수에 유실돼 유해 수구를 찾지 못하는 등 자연적 요인에 의해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참전 용사들은 증언했다.

미국에서도 ‘살아온 전사자’들이 있었다. 베트남군에 포로로 잡혀있다 극적으로 생환한, 유진 맥다니엘이라는 병사는 “나는 싸울 각오가 돼 있다. 부상당하고 포로로 잡히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해) 버려질 마음의 준비는 돼 있지 않았다”고 말했었다. 미국은 얼마전에도 새로 발굴된 미군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했다. 미군의 엄숙한 송환행사를 보면서 우리의 경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앙케고지=이동준기자

■[베트남과 따이한/인터뷰] 美MIA 차일드리스 중령

하노이 주재 미군실종자사무소(U.S. MIA Office) 책임자인 프랭클린 F. 차일드리스 중령은 22일 유해분석전문가인 개리 플래너건씨가 동석한 가운데 가진 인터뷰에서 “발굴한 유해 중 신원확인이 안된 것도 있으나 연합군의 것인지는 단정하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_주요 임무는 무엇인가.

“우리의 목표는 미군 유해발굴 및 송환, 생존자 관련 문건 및 진술 등을 통한 실종자(MIA) 신원 확인이다. 이는 ‘국가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Matter Of Highest National Priority)’로 규정됐다. 1992년 1월23일 베트남과 합동조사단(JTF)을 구성한 이래 2만8,008건의 자료를 검토했고 59회에 걸쳐 유해발굴작업을 했다.”

_그동안의 성과는.

“베트남 전쟁에서 실종된 미국인 2,583명 가운데 현재까지 555명은 생사가 확인됐다. 그러나 아직도 베트남 지역의 1,518명을 포함한 총 2,028명이 미확인 상태다. 이중 593명은 해상 실종됐거나 전사뒤 강변에 묻혀 유골이 유실돼 유해발굴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_베트남전쟁 MIA의 유해발굴은 어느 정도 진척됐나.

“지금껏 307구의 미군 추정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했고 이 가운데 DNA 검증 결과 137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17일 공군 중령 출신 1명의 신원을 추가로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_발굴한 유해 가운데 연합군으로 확인된 것은 없는가.

“우리는 미군 MIA의 신원확인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일본 독일 호주 등이 유해확인을 요구,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서 발굴한 유해 4, 5구를 이들 국가에 송환했다.”

_한국 정부가 유해확인 요청을 한적이 있는가.

“공식적으로 협조 요청을 받은 바 없다. 요청후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곤란하다. 하와이에 있는 본부측에 입장을 타진해 보는게 좋겠다.”

_올해의 유해발굴 계획은.

“5차례의 베트남과의 합동 유해발굴 및 자료 검토작업이 예정돼 있다. 현재 호치민 루트 지역 인근에서 미군 13명, 베트남인 170명이 한 팀으로 구성된 유해발굴단이 가동 중이다. 유해발굴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는 베트남측에 감사한다.”

/하노이=이동준기자

■[베트남과 따이한] 전사자수 '고무줄통계'

국군 전사자는 몇명인가. 베트남전쟁 관련 기록을 추적하면서 생기는 의문이다. 국방부가 1994년 발표에서 총사망자를 5,066명으로 재확인했지만, 관련 학계에서는 쉽게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발표기관마다, 시기마다 최대 수백명씩 차이가 나자 참전전우회 마저 ‘대충 5,000명쯤’으로 덮어두는 분위기가 됐다.

이세호(李世鎬·당시 중장)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국군이 완전 철군한 1973년 5월 국회 본회의에서 “전사 3,844명, 전상(戰傷) 8,344명, 비전투요원 손실 3,738명의 인명 피해를 낸 것은 가슴아픈 일”이라고 보고했다. 여기서 비전투손실은 업무중 사고로 인한 순직과 질병 등에 의한 단순사망, 일반 부상 등을 총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85년 발간한 주월한군전쟁사에서는 전사자 3,806명, 순직 및 사망 1,154명 등 총 사망자가 4,960명으로 바뀐다.

국방부는 이어 1992년 2월29일 육군 3,530명 해군 1,094명 등 전사자 4,687명과 순직 등 기타 사망자 364명으로 총 5,051명 사망으로 수정했다. 순수 전사자수가 7년 사이에 800명 이상 늘었다. 국방부는 1994년 4월22일 발표에서 다시 전사 4,650명 등 총사망자를 5,066명으로 재집계했다.

전사자에 대한 ‘고무줄 통계’가 계속되자 자민련 안보특별위원회는 지난해 심포지엄을 열었다. 여기서는 나온 사망자수는 5,083명. 그러나 지난 6일 AP통신이 보도한 베트남 종전기획기사에서는 5,077명으로 다르게 기록됐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에는 현재 혼백만 있는 위폐 2개를 포함, 4,687기의 묘가 있다. 전사자 중 일부는 가족의 뜻에 따라 국립묘지 안장을 반대했다는 게 현충원측의 설명이지만, 전체 명단 확인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전사자 집계가 이처럼 뒤죽박죽인 것은 기초 기록인 전투상보와 일지가 애초부터 조작됐거나 일부는 아예 소실됐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보훈처 등은 전후(戰後)에 민원이 들어오자 전사자 수를 계속 수정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던 김모(56)씨는 “당시 지휘관들이 전과는 자세하게, 그러나 손실은 불분명하게 기록하는 일이 많았다”면서 “실종자를 전사처리한 경우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당국의 기록관리 소홀로 1992년에는 고엽제 피해자들이 전공상(戰公傷) 심의를 받기 위해 서류를 신청했으나 상당수는 파월기록 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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