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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문화탐험](8) 사포의 섬 레스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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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문화탐험](8) 사포의 섬 레스보스

입력
2000.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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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이었다. 파도들이 마구 뒤집히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휙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레스보스 섬에 도착했다.기원전 6세기에 한 여자가 살았던 섬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은 그녀는 자신의 전설보다 훨씬 더 빛나는 시로 앞 시대의 호메로스의 대칭이기도 한 아름다운 여류시인이었다.

‘따던 사람이 놓치고 말았는가/ 그래 놓치고 말았기에/ 높이높이 팔조차 닿지 않는/ 저 빨간 능금’

그녀의 이름은 사포! 그곳 본명으로는 포사포였다.

뒷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된 시편들 중 전해지는 것은 4행시 213편의 단편(斷片)들이다. 최근 그녀의 작품으로 확인된 고대 그리스어 파피루스가 발굴되었다.

그녀의 행적이 화젯거리로만 오도되어 정작 그녀의 시에 대한 진지한 평가는 더 요청되어 마땅하다. 그리스 최대시인의 하나인 사포의 시 없이는 세계문학사는 또 하나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영웅 서사와는 달리 그녀 자신과 숨김없는 인간 개체의 진실을 노래하는 ‘무르익은 서정’의 세계는 찬란했다. 시신(詩神) 무사이(뮤즈) 9명에 이어져 ‘제10의 뮤즈’가 바로 사포이기도 했다.

리라의 반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광설 같은 서사시와는 달리 피리 반주로 가락이 이어지는 서정시는 우아했다.

사포의 섬 레스보스는 아테네 공항에서 30분간 동쪽 바다 저쪽으로 날아가면 있다. 터키 땅과 빤히 맞보고 있다. 그 섬의 도시 미틸리니는 파도가 유순하게 잦아드는 반원의 만(灣)으로 된 항구였다. 아직 다른 나라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사포호텔 레스비온 호텔 따위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사포는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그래서 동성연애를 이 섬의 이름을 따서 레즈비언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섬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은회색 올리브 나무가 언덕을 뒤덮고 있고 포도밭의 풍작도 기대되고 있었다. 일찍부터 소아시아나 중동 이집트 등지와의 무역을 기반으로 고대 이오니아 문명이 번영하던 곳이다.

지금은 시내에 병원이 하나밖에 없으며 호화로운 페리가 들어오자 항구는 그때까지 적막했던 빈 공간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사포는 이 섬의 남쪽 에레소스 귀족 가문의 딸이다. 아버지는 일찍 해전에서 전사했다. 어머니와 오빠들과 아우 사이에서 자라났다. 섬의 참주(僭主)에 대한 정치적 갈등 때문에 그녀 일가는 멀리 시칠리아 섬으로 망명했다.

그곳 사라쿠사 거상(巨商) 미르퀴라스와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어 막대한 유산을 받았다. 그녀는 레스보스로 돌아왔다. 딸 크레이스와 함께였다.

여기서부터 사포의 시대가 개막되는 것이다.

많은 시가 그녀의 시정(詩情) 가득한 가슴 속에서 나왔다. 본토나 다른 섬들 그리고 저 건너 이오니아 연안 일대에서도 그녀의 시가 애송되었다.

그녀는 처녀들을 선발해서 시와 음악과 신들에 대한 제례 등을 가르치는 특수한 기구를 창립했다. 그것은 상류사회의 여성을 위한 교양만이 아니라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받드는 비교적(秘敎的)인 공동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신을 제사지냄으로써 그들 자신도 미와 사랑의 신이 사는 세계로 들어간다는 신앙이었다.

실지로 사포의 시에는 아프로디테를 찬미하는 것이 적지 않다. 그밖에도 그녀는 그리스 신들 가운데 많은 여신들과의 혈연관계를 꿈꾸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극심한 남성 본위였다. 여성의 지위는 가정과 가정 밖에서 철저하게 종속되었다.

이같은 현실에 대해 사포는 퍽이나 저항적이었고 여성 옹호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리스 동쪽 아마존 여성국가의 여자와 그리스 남신이 싸우는 그림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사포는 그런 아마존을 그리스에서도 실현시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포 처녀학교의 학생들은 혼기를 맞거나 연애 때문에 떠나는 일이 많았다. 떠나는 처녀 가운데는 사포가 총애하는 미인도 있었으니 그 실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늘날 미틸리니 해안도로 복판에 서 있는 얌전한 사포상(像)은 나이든 사포가 아니라 바로 그녀가 거느리고 있던 소녀상처럼 애처로웠다.

그리스 상류사회의 여인에게는 서사시 반주의 리라나 서정시 반주의 피리 그리고 시를 읊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사포는 떠나는 처녀들이 결혼할 때는 축가도 불러주었으나 축가인데도 그 내용은 애가이기 십상이었다. ‘저녁 별은 아침 햇빛이 비추는 것들을 모두 제 자리에 데려간다/ 양들을 데려가고/ 산양들을 데려가고/ 어머니의 손에 아이를 데려간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소녀가 있다/ 황금빛 꽃도 능가하는 크레이스…’

이것은 딸을 노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무척 아껴서 잘 교육시킨 처녀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집트까지 포도주 무역을 하는 아우가 그곳 창녀에게 재산을 탕진하는 것을 꾸짖는 시도 썼다.

그녀는 55세의 나이로 20세 미남선원 파온을 열애했다. 파온이 레스보스를 떠나 레스카스로 가자 그 섬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기원전 558년 사포는 돌이킬 수 없는 실연으로 말미암아 아폴론 신전이 있는 섬의 남쪽 절벽 끝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녀는 살아오는 동안 ‘제10의 뮤즈’였고 반여신(半女神)이었으며 죽어서 불멸의 여신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레스보스에는 여류시인 사포와 함께 남자시인 아르카이오스가 있다. 그들은 다 같이 그리스 초기 아르카익 시대 서정시의 별들. 헤시오도스, 소론, 티울타이오스 등과 함께 그리스 시세계를 수놓았다.

그녀는 레스보스의 아이오리스 방언으로 시를 썼다. 9권으로 분류될만큼 방대한 양인데 지금은 산실된 2행 단짜의 조각들 700행이 남았다.

나는 레스보스의 며칠을 오랜만에 할 일이 없는 것처럼 해안 인근의 이면도로, 시장 그리고 변변치 못한 식당밖에 없는 거리를 기웃거리며 지냈다.

그런 곳에 행여 사포가 살았던 흔적이 있을지 몰랐다. 그리스 여성들은 메리나 메리쿠리와 같은 혁명적 여배우가 뿜어대는 담대한 연기와는 무관하게 그리스 남성사회에 별다른 불만 없이 살아가고 있다. 감정은 풍부하다. 때로 거칠기까지 하다.

레즈비언 혹은 호모 섹스를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남성 여성으로 나뉘어지지만 남성 중에도 더 남성적인 사람과 여성적인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고대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 사회에서는 성공한 지도층은 으레 미소년과의 동성애를 자랑삼았다.

사포 시대보다 200년 뒤의 소크라테스도 그 못생긴 얼굴에도 불구하고 미모의 젊은이가 그를 짝사랑하기도 했다.

여성 중에도 남성적인 여자와 그런 여성을 따르는 여자와의 성애관계가 가능하다. 이는 플라톤이 여성을 저주받은 존재로 말하고 여자는 단지 좋은 남자를 낳기 위한 도구로 말하더라도 그 당시 공공연한 동성관계가 성행했다.

인간은 남녀 사이의 이성(異性)을 통한 사랑 말고도 그 이성보다 동성 사이의 관계가 훨씬 부자연스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남자끼리의 우정, 여자끼리의 우정과 애정을 통한 인간정신의 충만이 실현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동성애는 결코 죄악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인류사와 함께 가장 오래된 인간관계의 한 표본이기도 하며 사랑과 우정의 다양한 전개이기도 한 것이다.

레스보스 섬은 다른 섬들보다 시인 혹은 예술가들이 많이 나온다. 하프의 신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유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려오는데 실패한 뒤 여성들을 피해 황야를 떠돌았다. 아름다운 남신인 그에게 욕정을 품은 트라키아 여인들이 그에게 거절당하자 그 몸을 여덟 갈래로 찢어죽여 바다에 던져버린다.

그의 머리와 하프가 레스보스 앞바다에 떠내려왔다. 그곳 사람들이 머리를 건져다 묻어주고 하프를 섬에 보관했다. 그 뒤 그 섬은 시와 음악, 학문에 뛰어난 사람이 나왔고 지금도 그리스 1급의 시인들이 이 섬에서 배출되고 있다.

섬에서 터키 땅은 부르면 바로 대답이 들려올 것처럼 내다보였다. 고대에는 하나의 생활환경이었는데 지금은 서로 다른 나라였다.

나는 이 섬에 있는 동안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하룻밤의 병실에서 밤새도록 환자 위문 온 친척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그 기운찬 인정들을 목격했다. 문병조차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라 시끌벅적한 잔치였다.

밤의 해안도로는 오토바이 젊은이들이 내달리는 소리로 가득차서 파도소리가 도리어 밀려났다. 아침 7시에는 희랍정교회의 북소리 행진이 지나나고 있었다. 그리스에서의 검은 옷은 그들의 하얀 집들과 함께 가장 낯익은 풍물이었다.

매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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