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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천문학자 조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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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천문학자 조경철

입력
2000.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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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50년 전, 6·25라는 전쟁이 터졌다. 그 전쟁 동안에 남북이 입은 피해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이후 남북한을 가르게 된 철조망과 지뢰밭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게 50년이란 세월동안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의 상징이 돼왔다. 그 세월은 전쟁과 마찬가지의 고통을 주었다.그동안 동서남북에 화해무드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매번 남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2000년의 봄바람은 심상치 않다. 그 바람은 한반도를 비껴가지 않고 이 땅에도 남북정상회담 개최라는 기쁜 소식을 안겨 주었다.

6월에 이뤄지는 이 회담에서는 여러가지가 논의될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이 칠순이 넘은 실향민이 바라는 것이란 오직 한가지이다. 죽기 전에 남북으로 갈라져 살았던 친족끼리 단 한 번이나마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일이다. 이제는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이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한 정상회담에 800여만 실향민이 거는 기대는 너무나도 크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나 그리고 내동생 등 단 네 식구였다. 많지도 않은 우리 가족은 아버님과 나는 남한에, 어머님과 동생은 북한에서 헤어진 채 살아아야했다. 1947년에 헤어져서 52년간이나 서로의 소식을 알거나 전할 길이 전혀 없었다.

그 당시에는 통일이 몇 년 내로 이루어질 것으로 간단하게 생각했었다. 이렇게까지 끌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한의 아버님은 끝내 어머님을 다시 만나 뵙지 못하고, 한 많은 가슴을 안고 돌아가셨다.

나는 지난 해 11월20일, 모 방송사의 주선으로 북한 땅 평양을 52년만에 밟을 수가 있었다. 그 곳에서 그렇게도 보고 싶던 동생과 상봉을 했다. 헤어질 때 14세의 동안(童顔)이었던 그는 기나긴 고생 탓인지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동생으로부터 어머님이 통한의 일생을 마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아버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반세기가 지나 만난 우리 둘에게 남은 것은 아버님과 어머님에 얽힌 추억 뿐이었다. 특히 어머님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많이 울었다.

아버님은 사업을 하시는 분이어서 양복을 입고 다니셨지만, 어머님은 완고한 민족주의자셨다. 평생 한복만 입으셨고, 핸드백도 전혀 들고 다니지 않고, 항상 주머니를 차고 계셨다. 은장도(銀粧刀)도 꼭 지니셨다.

특히 일제시대를 살면서도 일본말은 단 한마디도 쓰지 않으셨다. 관공서에서 혹시 일본말로 쓰고 말을 해야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나 아니면 대리인을 내세워서 일을 치르셨다. 어머님이 3·1운동을 몸소 겪었고, 집안 친척들이 무수히 일본 군경에게 잡혀갔으며, 그 중 한 사람은 끝내 희생됐기 때문이었다.

어머님은 두 아들에게 절대 매질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 어머님께 맞은 적이 있다. 그것도 회초리가 아닌 장작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놀기를 너무나 좋아해 학교공부는 건성이었다. 그러나 학기말에 받아오는 성적표에는 모든 과목이 갑(甲)이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나 4학년 1학기에 받은 성적표에는 을(乙)을 받은 과목이 7개나 되었다. 눈치로 때려잡던 엉터리 실력이 4학년에서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성적표를 보신 어머님은 조용히 “저 뜰에 말려놓은 장작개비 하나를 갖고 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는 나는 ‘왜 그러시나’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장작을 받아든 어머님은 “너는 이제 정신을 차릴 때가 됐다. 내가 너한테 하는 매질의 아픔이 너의 노는 버릇을 고쳐주기를 바란다”라며 나의 등과 다리를 장작으로 마구 내리치셨다. 나는 한마디도 못하고 계속 맞았다.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나는 그 날부터 시작되는 방학 3일간을 꼼짝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어머님은 단 한 마디 위로의 말씀도 없이 음식만 가져다 주셨고, 아버님도 한 마디 않으셨다. 않으셨다기보다는 어머님의 위세에 아버님의 기세가 눌려버린 듯했다. 물론 그 이후부터 나는 노는 데에만 정신을 파는 일이 없어졌고 성적표도 모두 갑으로 채워졌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저녁밥을 먹고 난 뒤 배가 불러 자리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부엌에서 돌아오신 어머님은 “경철아, 일어나 앉거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 책을 쓴 사람이 누워서 썼겠니? 아마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앉아서 썼을 터이니 그 분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누워서 책을 읽어서는 안되지 않겠냐. 너도 이제 중학생이니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오늘날까지 나는 책을 읽을 때에는 반듯하게 앉는다. 그 책을 쓴 사람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서도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나의 자식에게도, 제자에게도 하였다. 어머님은 비록 저승에 가셨으나 그 분의 추상같은 명훈(命訓)은 자손 대대로 이어질 것이라 나는 믿는다. 북한에 있는 동생도 책을 읽을 때에는 반듯이 앉아서 읽는다고 했다.

●조경철은 누구

1929년 평북 선천 태생

연희전문 물리학과, 미국 펜실배니아대 천문학과 졸업(이학박사)

연세대교수, 경희대 부총장 역임

한국천문학회, 우주과학회, 아마추어천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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