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 중에는 학창시절 학교에서 시력검사를 할 때 검사표 한쪽에 한씨 표준시 시력표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시력표는 1964년에 바로 내가 만든 것이다.나는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던 60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는데 현지에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정밀한 시력표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시대에 사용하던 시력표를 약간 변형해 사용했었다.
일본어를 우리 글로 살짝 바꾼, 조잡한 것이었는데 이는 아무리 크기가 비슷해도 글자 자체가 달라지면 굵기나 시각 인지도 등에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이런 시력표로는 정확한 측정이 어려웠다.
61년 귀국한 나는 이듬해부터 정확한 시력표를 만들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 2년여간의 작업끝에 시력표를 만들었다. 나는 글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시력표에 비행기 나비 자동차 우산 등의 그림을 집어넣었고 ‘E’도 집어넣어 어느 방향으로 트였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등 예전의 것과 차이를 두었다.
시력표를 만든 뒤 시험을 해보니 같은 크기의 숫자나 글자라도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즉 단순한 것은 멀리서도 식별이 잘 되나 복잡한 것은 가까이 다가와야 식별이 됐다. 이런 것을 모두 감안해 시력표를 최종 완성했다.
나는 곧 대한안과학회에 시력표 제작 결과를 발표했으며 72년 당시 보건사회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공인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학교와 안과, 안경점 등에서는 내가 만든 시력표를 주로 사용하게 됐다.
그뒤 다른 시력측정표가 보건복지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제작됐는데 실제로는 내가 만든 것을 많이 본뜬 것이었다. 그래서 사법 당국에 고소해 결국 피고가 50만원의 벌금형을 받게됐다.
평생을 사람 눈을 다뤄온 나로서는 내가 만든 시력검사표가 널리 사용됨으로써 사람들이 시력을 제대로 측정하고, 그래서 시력보호에 도움을 받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게다가 이 때문에 재판까지 하게 됐으니 시력표에 관한 기억은 이래저래 ‘평생 가장 잊지 못할 일’로 남아 있다.
/한천석 안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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