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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산실](16) 반연간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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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산실](16) 반연간지 '비평'

입력
2000.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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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잡지들은 편집자의 개인적 세계관을 매우 강하게 반영하고, 어떤 잡지들은 그것을 상대적으로 덜 반영한다. 1970년대의 ‘문학과 지성’이나 ‘창작과 비평’ 같은 잡지는 그 잡지 편집자들의 세계관이 짙게 반영된 잡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김현이나 김병익 같은 이름 또는 백낙청이라는 이름과, ‘문지’나 ‘창비’ 같은 제호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비하면 예컨대 ‘세계의 문학’ 같은 잡지와 그 잡지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 가운데 하나인 김우창이라는 이름은 불가분의 관계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편집자의 개인적 성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더 중요하게는 잡지 편집자가 그 잡지를 내는 출판사와 맺고 있는 관계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백낙청씨나 고(故) 김현은 출판사 창작과비평사나 문학과지성사의 주체였던 반면에, 김우창씨는 ‘세계의 문학’을 내는 민음사의 주체는 아닌 것이다.

김우창(63·고려대 영문과 교수)씨가 주재해 지난해부터 나오고 있는 반년간지 ‘비평’은 ‘세계의 문학’에 견주면 김우창씨의 스타일이 한결 더 반영된 잡지인 것 같다. 물론 김우창씨가 이 잡지를 내는 출판사 ‘생각의 나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잡지의 편집 주체는 1992년에 창립된 비평이론학회이고, 김우창씨는 이 학회를 이끌고 있다. 김우창씨가 오래 관여했던 ‘세계의 문학’보다 지난해에 창간된 ‘비평’에 오히려 김우창이라는 이름이 더 겹쳐지는 데에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김우창씨는 한국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이고 어쩌면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이겠지만, 바로 그래서 그의 글은 누구나 편한 자세로 읽을 수 있는 친절함을 베풀지 않는다.

그의 글이 지닌 형식적 유장함, 내용적 깊이와 폭은 서로 스며들고 상승하여 독특하고 단아한 한국어의 공간을 빚어내고 있지만, 그 공간의 단아함은 일반 독자들의 눈길을 붙잡을 선동성과 선정성을 희생한 댓가로 마련된 것이다.

김우창이라는 이름이 ‘세계의 문학’이라는 비교적 대중적인 잡지보다는 ‘비평’이라는 전문지에 더 어울리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게다가 그 제호 ‘비평’은 김우창씨의 지적 궤적을 압축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문학 비평이든 사회 비평이든, 김우창씨의 글쓰기는 지난 한 세대 이상 한국에서 발설된 비평적 담론의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 주었다.

김우창씨가 ‘비평’ 창간사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비평’의 중심적인 관심은 문학과 문화, 그리고 사회와 역사의 이론이라고 한다. 김우창씨는 이 잡지가 어떤 하나의 이론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러 이론적 작업을 위한 비판적 공론의 장을 제공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잡지가 나침반 없는 항해를 목표로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창간호에 실린 김우창씨의 ‘오늘의 인문과학과 코기토’는 이 잡지가 수행하고 있는 비평적·이론적 작업의 한 부표(浮標)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우창씨는 이 글에서 오늘의 인문과학이 직면한 상황을 “사람 사는 일이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어지럽게 된 것”이라고 요약하고, 그래서 정신을 차리는 문제, 정신을 가다듬는 문제를 따져 본다. 김우창씨가 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기대는 것은 해체주의자들이 저주하는 이성과 합리성이다. 그러나 김우창씨가 이성과 합리성의 위험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성이 권력의지의 표현이고, 이성과 합리성이 힘의 장(場)에서 투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성을 하나의 갈등 과정에서 생겨나는 보편성의 확대 궤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이성은 반성하는 이성이다. 그가 말하는 이성의 원리는 단순한 실증적 원리가 아니라 자기비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원리다.

그의 합리성은 합리성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는 도덕적·미적 지혜들을 껴안을 수 있는 오지랖 넓은 합리성이다. 그 이성은 오늘의 사유를 역사의 사유에 일치시킬 줄 아는 개인적 공감의 능력과 또 그것을 넘어가는 보편적 사유의 능력이고, “오늘의 시점에서 자기반성적으로 정화된 코기토”다.

이런 자기비판적 이성은 김우창씨의 발명품은 아니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이것의 중요성을 정제된 언어로 되풀이 강조해 왔다. 어쩌면 이 자기비판적 이성이야말로 좌우, 동서, 고금(古今)을 감싸안는 ‘제3의 길’일지도 모른다.

지난달 말에 나온 ‘비평’ 2호는 ‘세계화’ 특집과 ‘대학의 개혁’ 특집으로 두툼하다. 피에르 부르디외나 노엄 촘스키 같은 외국인들을 포함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섬세한 정신들이 ‘비평’의 지면을 채우고 있다.

/고종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창간사 / 새로운 탐색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독단론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큰 이론들의 종말은 독단론의 종말을 말한다. 그것은 경하하여야 할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론 없는 현실은 또 하나의 독단론을 형성한다. 세계 자본주의의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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