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도 한식날에 아버지 산소엘 다녀왔다. 나의 아버지 이인수(李仁銖)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어느덧 10년이 되어오는데도 무덤 앞에 다가설 때마다 “오, 혜성이 왔니?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었구나”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시던 아버지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아버지는 나에게 영원한 ‘선생님’이시다. 슬하에 딸만 여섯을 두신 아버지는 일생을 교사로 지내시면서 성실, 근면, 봉사, 정진을 생의 목표로 삼으시고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딸들과 제자들을 정성껏 길러주신 스승님이다. 이화여고 재학 시절 아버지는 나의 국어 담당교사이셨고, 나는 아버지가 창설한 교내 봉사단체 ‘샛별클럽’의 회원이었다. 아버지는 또 대학을 졸업한 뒤 약 3년동안 같은 학교(아버지는 이화여고, 나는 이화여중)에서 근무한 동료교사이기도 했다.
평생을 국어교사로 지냈지만 매일 새벽마다 같은 내용의 국어 교과서를 한두시간씩 새롭게 공부하고 교실에 들어가시던 아버지. 이른 새벽 기독교방송의 ‘오늘의 명언’을 틀어놓고 채근담(蔡根譚)을 위시한 위인들의 명언을 열심히 기록한 뒤 그 내용을 교실 칠판에 정성스럽게 판서해놓곤 하시던 아버지. 늘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며 성실하게 강의 준비에 열중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제자들을 바르게 길러내기 위해 늘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가르침에 열과 성을 다하셨던 그런 아버지, 이인수선생님을 나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아버지는 ‘여성이 깨어야 민족이 산다’는 교육철학을 신념처럼 지니고 계셨다. 여성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민족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믿으셨다. 그래서 늘 ‘목표는 높이 하늘에 걸고 발은 대지를 밟으며 한걸음 한걸음 정진하라’ ‘진정한 승리는 건강한 동기에 있다’ ‘산은 오르는 자만이 정복할 수 있다’는 명언들을 일러주시면서 ‘인류를 위한, 인류의 딸이 되라’고 격려하셨다.
‘부드러워라. 그리고 강하라’‘모든 나날을 최초의 날처럼 살자. 최초의 날처럼 긴장하고 최초의 날처럼 조심하고 최초의 날처럼 성실하고 최초의 날처럼 열중하자’‘소낙비처럼 살지 말고 솟는 샘물처럼 살자’…. 동창들 중에는 초로의 나이가 된 지금도 학창시절 아버지께서 일러주시던 명언들을 생활의 좌우명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천중학교를 거쳐 이화여고에 부임하자마자 아버지는 “항상 남을 돕고 남을 섬겨야 한다”며 봉사단체인 ‘샛별클럽’을 창설하셨다. 그리고 교직에서 은퇴하실 때까지 지도교사로 샛별클럽을 키워오시면서 학생들에게 참된 봉사의 정신을 심어주셨다. 아버지는 샛별클럽을 창설하신 후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여름에는 농촌봉사, 겨울에는 고아원 봉사로 방학을 방학답게 보내신 적이 없으셨다. 여섯명의 딸이 모두 이화여고 출신인 우리 집에서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동생들 넷이 모두 샛별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다. 지금도 이화여고에는 창립 46주년을 맞는 샛별클럽 회원들의 우정이 기수 별로 변함없이 이어져오고 있다.
학창시절 나는 늘 스승이신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딸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버지를 어려워했고, 아버지도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고교 2학년 때 이화여대에서 주최한 여고생 문학 콩쿨에서 나의 단편소설이 당선되었을 때 마치 집안에 큰 경사라도 난 것마냥 기뻐하시며 자랑하고 다니시던 아버지를 보고 새삼 자신감을 갖게 됐고, 아버지의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뒤로는 무슨 일을 하든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했고 아버지의 칭찬과 격려를 내 삶의 보물처럼 여기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편지를 참으로 많이 써 주셨다. 편지를 쓸 때에도 초(草)를 잡아서 일단 파지에 썼다가 다시 새 종이에 정서(正書)를 해서 보내시곤 했다. 대학졸업 후 아버지의 간곡한 권고로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동안 아버지의 손 때가 묻은 따뜻한 편지들을 읽으면서 나는 아버지와 더욱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내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기쁨과 자랑은 정말 대단하셨다. 여섯 명의 딸들 중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가 공유했던 화제는 무궁무진했다.
나는 내가 특별히 중요한 특강을 해야할 때면 아버지 앞에서 리허설을 했고, 조심스러운 원고는 제출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검사를 받곤 했다. 거의 예외 없이 아버지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와 칭찬과 공감을 해주셨으며, 늘 더 좋은 방향으로 다듬어 주셨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아버지에게서 지도를 받고 점검을 마쳐야만 안심이 되었다.
내가 항상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절대적인 지지와 칭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아버지의 육성을 들을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스승이요, 동료요, 지지자요, 카운슬러요 희망이었던 아버지를 지난 50여 년간 모시고 살아왔음에 감사드린다.
/이혜성 한국청소년상담원장, 이화여대 교수
● 이혜성은 누구
1939년생. 이화여고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상담자 교육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이화여대 심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청소년상담원 원장으로서 청소년 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적 상담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모교 이화여고의 총동창회장이기도 하며 지난 해 환갑을 기념하는 자전에세이 ‘사랑하자, 그러므로 사랑하자’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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