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계 큰 별이 졌다. 19일 타계한 한경직(韓景職) 목사는 해방 후 한국 개신교계를 부흥시킨 대표적 목회자이자 한국 개신교계의 산 증인이었다.1933년 신의주에서 목사의 길로 들어선 이래 73년 서울 중구 저동 영락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돼 목회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한국교회 부흥을 위한 목회 활동에 전념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교회와 사회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개신교계의 사표였다.
한목사는 또한 자기 이름의 집 한 채와 통장 하나 갖지 않은 청빈한 삶과 한결같은 신앙생활로 일관해 교계 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존경 받아온 종교 지도자였다.
1990년 3월부터 한국일보사와 공동으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펼쳐 92년에는 제3세계 빈민국 지원과 사회복지활동 및 목회활동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1902년 평남 평원에서 태어난 한목사는 평양 숭실대, 미국 엠포리아대와 프린스턴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33년 신의주 제2교회 목사를 시작으로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신의주에서 10년 동안 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고아원을 설립해 가난한 어린이들의 의지처가 됐던 한목사는 해방과 동시에 서울로 와 영락교회를 창설했다. 이후 27년 동안 복음화에 앞장서 영락교회를 성도(聖徒) 5만이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큰 교회로 키워냈다.
그는 고아원과 경로원, 모자원 등을 설립하고 홀트양자회 이사장을 지내는 등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데 힘써왔으며 대광학원ㆍ보성학원 이사장과 영락중고교ㆍ영락여자신학교의 설립자, 그리고 숭실대 학장과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육영사업에도 애썼다.
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대 총회장으로 선출된 한 목사는 83년에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에 취임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명실상부한 대표자로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로 일하는 등 한평생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헌신했다.
한목사는 만년을 경기 광주군 남한산성 내의 20평짜리 교회사택에서 사위 이영헌(李永憲·83)목사 내외와 함께 지내다가 최근 건강이 급격히 악화해 영락교회로 옮겨와 지내왔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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