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배우열전](10) 유태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배우열전](10) 유태균

입력
2000.04.19 00:00
0 0

유태균(53)씨의 삶은 무대의 어법을 꽤나 모방하고 있다. 1인 다역, 역할 바꾸기 등 특히 요즘 젊은 연극인들이 무대에서 즐겨 구사하는 연극적 장치들이 그의 삶을 만나, 유용한 설명 도구가 되니.단국대 스포츠 과학부 교수, 극단 반딧불이 대표 겸 예술감독, 연극배우협회 이사, 현역 배우. 사실 모두 지금의 그를 설명하는 말이다. 하나 더 있었다. ‘운동권 학생처장’. 1981-1993년 모교인 단국대에서 학생처장 등 보직교수로 있을 때, 그는 경찰한테 가서 과격진압말라며 설득했다. 또 학생들은 그가 준 명함을 내밀며 외상술을 보란 듯 먹었다. 그 작위는 그런 그에게 두손 드는 심정으로 학교측이 내렸던 과외의 선물이었던 셈.

연극을 하게 된 동기도 꽤나 연극적이다. 단국대 체육학과 67학번이었던 그는 대학선거판에 휘말려 팔을 다치자, 어릴적 막연하게 꿈꿨던 배우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교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한 것. 이미 그 시절, 주역을 다섯 번 맡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사실 그는 강의, 학사행정 등 이유로 반쪽이 배우 노릇밖에 못 하는 자신에게 늘 미안하다. 그러다 1995년 경극의 신체 훈련법을 익히기 위해 북경 희곡학원에서 한 달을 공부한 그는 1997년 12월 극단 반딧불이를 창단, 연극인으로서의 해묵은 소원을 풀었다.

‘겨울 동화’ 등 3번의 극장 공연을 마친 반딧불이는 지난 2월 실험극 ‘몽유’로 국내 최초의 스튜디오 공연을 시도했다. 수용 한도 70명에 만원 사례

. 관람료 수입 전부를 출연 배우 10명에게 분배한 그의 운영 방식은 IMF 한파속 잔잔한 화제였다. 또 매회마다 불우 이웃 초청 무료 공연을 펼쳐, 장애자 미화원 고아원생 등 소외 계층이 연극의 향취에 빠져갔다.

그는 무대에서 쉼없이 변신하는 배우로 돌아왔을 때 가장 마음 편한 사람이다. “이제는 겸허하게, 배우로서 최선을 다 하겠다”는 ‘비장한 선언’ 때문이 아니다. 학사업무를 보느라, 10년 떠나야 했던 무대는 늘 마음의 빚이었던 것.

사실 결혼의 순간에도 뜨지 못한 무대였다. 1978년 그가 결혼식을 올렸던 데가 삼일로 창고극장, 사회자가 배우 이호재. 그러나 식후 찾아간 곳은 대구 계명대극장. ‘고도를 기다리며’의 에스트라공으로 연기한 다음에야(연출 유중열) 신혼여행을 떠났던 그다.

연극 평론가 구히서씨는 그가 1993년 보직교수를 접고, 극단 여인극장의 ‘박사를 찾아서’로 10년 만에 무대에 복귀하자 이렇게 반겼다. “한 번 배우는 영원한 배우다.” 그 말 속에는 “겉으로는 전혀 끼없어 보이지만, 성실하며 진솔하게 무대에 임한다”며 자신이 이전에 내렸던 평을 재확인한 반가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달을 쏘다’는 20-5월 7일 문예회관소극장에서.

“나는 종아리가 쭉 빠진 여직원에 대한, 치명적인 궁금증이 있지.” 그는 어느새 ‘달을 쏘다’에서의 의뭉스런 실장으로 변해 있다.

장병욱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