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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특집/시들지 않는 청춘의 역사 "아!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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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특집/시들지 않는 청춘의 역사 "아! 4.19"

입력
2000.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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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 속에서 꽃같은 젊은이들이 스러져간지 어언 40년. 40년 전 그날은 민주주의를 향한 온 국민의 갈망이 혁명의 열기로 분출된 날이었다. 그 한가운데 서서 민주주의의 제단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한 젊은이들도 이젠 환갑을 훌쩍 넘긴 채 시대의 전면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목놓아 부르짖었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이라는 ‘4·19정신’은 여전히 푸르게 살아 숨쉬고 있다.■4·19세대의 현주소

4·19세대의 부침은 정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계로 대거 진출한 그들은 이번 16대 총선에서 눈에 띄게 ‘몰락’했다. 보스정치에 눌리고 80년대 학생운동 출신 ‘386세대’에 밀려난 것이다.

혁명 하루 전날인 4월18일 시위를 주도하며 혁명의 불을 당긴 고려대 출신 정치인들은 4·19세대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려대 상대학생위원장으로 결의문을 읽었던 이기택(李基澤) 민국당 최고위원은 이번까지 세 차례 거푸 낙선했다.

정경학생위원장으로 선언문을 낭독했던 이세기(李世基) 한나라당 의원은 386세대 대표주자인 임종석(任鍾晳) 전 전대협의장에게 고배를 마셨다. 김중위(金重緯) 한나라당 의원은 ‘반민주 반인권 의원’으로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 대상이 되면서 떨어졌다. 서울대의 박범진(朴範珍) 민주당 의원과 이태섭(李台燮) 전 의원은 낙선, 박실(朴實) 전 국회사무총장은 낙천했다.

‘4월회’ 회원인 박실(朴實), 이재환(李在奐), 김덕규(金德圭), 유인학(柳寅鶴), 강희찬(姜熹瓚), 이경재(李敬在), 염정길(廉正吉), 오유방(吳有邦), 정남(鄭男), 서석재(徐錫宰)씨 등 혁명의 선두에 섰던 전·현직 의원들도 공천을 받지 못했거나 낙선했다. 신경식(辛卿植) 박관용(朴寬用) 의원은 재선됐지만 시민단체의 공격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4·19정신은 살아있다.

정·재계로 진출한 4·19세대의 부침과는 무관하게 “ ‘4·19정신’의 뜨거운 피를 간직한 채 자기 위치에 충실한 이름 없는 투사들은 건재하다”는 것이 대다수 4·19세대들의 주장이다.

박종구(60) 4·19부상자회 회장은 “출세를 위해 독재정권에 협력, ‘변절’했거나 4·19정신을 팔아먹었던 일부 삐뚤어진 4·19세대가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고 묵묵히 일해 온 사람들이 4·19 정신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학우 6명을 잃었다는 박명수(朴命洙) 중앙대 안성캠퍼스 부총장은 “4·19세대와 80년대 5·18세대는 20여년의 시간 차이만 있을 뿐 부정과 독재에 항거한 젊은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며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이라는 고귀한 정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바람은 33년 전 신동엽 시인이 ‘껍데기는 가라’에서 예찬한 ‘흙가슴과 알맹이’였다.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년 신동엽(申東曄)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4.19특집] 부상후송 인연 의형제 맺은 현태길-이영민씨

“잊혀져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날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되지….” 이날만 되면 가슴 가득 차오르는 자부와 회한으로 40년전 그날이 바로 어제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 경무대(현 청와대) 시위현장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 시위대원으로 마주쳤던 현태길(玄泰吉·64·전 진로유통 사업부장)씨와 이영민(李榮民·59·경기지방공사 부사장)씨. 그날의 인연으로 의형제가 된 두 노신사가 18일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1960년 4월19일 오후1시30분께 경무대 시위현장. 당시 서울 강문고(현 용문고) 3학년이던 이씨는 경찰의 무차별 발포에 뒷머리, 어깨, 다리 등 3곳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총에 맞은 줄도 모르고 무작정 뛰던 이씨가 효자동 전차종점 앞에서 쓰러지자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당시 동국대 정외과 3학년 현씨는 이군을 들쳐업고 뛰기 시작했다. 모조리 닫혀 있던 주변 병원을 전전하던 현씨는 다행히 지나가던 앰뷸런스를 발견, 이군을 서울역앞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했다.

나중에 같은 고등학교 출신임을 알게 된 두 청년은 의형제를 맺었고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담은 사진은 라이프지(60년 5월23일자)를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이씨가 간직하고 있는 이 사진은 당시 한국일보 백형인(白炯寅)기자가 찍은 것인데 보도통제로 국내 신문에는 실리지 못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틈날 때마다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는 두 사람. “그날 이후로 40년이 지났지만 정치만은 예전의 구태 그대로”라는 현씨의 말에 이씨는 “내 옆에서 쓰러졌던 그 많은 영혼들이 아직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4.19특집/특별기고] 안동일 변호사

안동일(安東壹·4월회 고문·변호사)

강산이 네번 바뀌어 4·19혁명 마흔 돌. 무엇이 달라졌고 얼마만큼 새로워 졌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김없이 돌고 돌아 해마다 봄을 구가하는 진달래와 함께 4·19는 새롭게 찾아왔고 오늘도 수유리 4·19국립묘지에서는 거창한 기념식을 갖는다. 그런데 올해도 무언가 여전히 허전하다.

40년 전 독재에 항거하다 먼저 간 4·19 영령 앞에 무릎 꿇고 진혼곡을 울려도 185위의 매서운 눈초리가 아직도 감겨지지 않고 우리를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4·19혁명을 기리는 후손들의 마음에 4·19의 참뜻이 메말라 가고 있고 점점 잊혀져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게 4·19혁명의 참뜻은 무엇이며, 4·19는 왜 일어난 것인가? 우리 국민은, 특히 요즘 세대는 4·19를 석기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하고 오늘에는 별 볼일 없는 한 때의 역사적 사건으로 치부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다.

학생이 주동이 되어 자유당 정권의 폭정과 영구집권 음모를 분쇄하여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혁명이었음에도 40주년을 맞는 오늘 서울시청 앞 광장에 초라하게 세워진 기념탑도 어쩐지 4·19가 국민의 무관심 속에 천대를 받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씁쓸하기만 하다.

필자는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변론했을 때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그의 무지에 충격을 받았다. 3·1운동과 유관순 열사에 대하여도 제대로 알지 못함에 경악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북한에서는 역사(History)를 가르치지 않고 유일사상(His Story)만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했는가? 4·19 이후 1년만에 5·16 쿠데타로 말미암아 30여년간 군부권위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동안 옷만 바꿔 입었지 가부장적 독재가 개발독재로, 개발독재가 군사문화로, 군사문화가 또다시 신 권위주의로 탈바꿈한 채 그대로 이어져 문민정부에 이르렀고 국민의 정부 시대에도 여전히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이렇게 4·19 정신은 역대 정권의 권위주의적 리더들에 의해 짓밟히고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어찌 국민들의 기억 속에 4·19가 제대로 기억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4·19가 언 땅 속에 갇혀 지내면서도 그 생명의 싹을 잃지 않고 용케 견뎌왔음을 자랑스럽게 기억한다. 한 때는 6·3 학생운동으로, 또는 유신반대투쟁으로, 부마항쟁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6월 시민항쟁 등으로 연면히 이어져 오늘의 민주시민사회를 이뤄냈고 마침내 이번 4·13 총선에서 여야 모두에게 따끔한 교훈을 줄 수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사고방식은 이땅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뼈아픈 심판이다. 이것은 비단 정치권에서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도 비민주적인 풍토를 쇄신하고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공익정신의 추구를 통해 숭고한 4·19의 얼을 되살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리하여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구태와 구습을 타파하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새로운 창의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이 창출될 때 4·19 정신은 우리 역사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라고 확신한다.

안치환의 노래처럼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소리 높여 자유여 해방이여 통일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는”사이비 지도자가 있는 한 4·19는 아직 피와 땀이 더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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