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2월 해군 법무관으로 법조인생을 시작한 이래 많은 사건을 다루었지만 그중에서도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근무하던 69년 11월의 ‘위장친목계’사건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가 않는다.피고인 22명이 국가를 전복하고 국헌을 문란시킬 목적으로 친목계를 위장,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게 이 사건의 내용이었다. 피고인에게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등의 죄목이 씌워져 제1심에서 주범은 징역 10년, 나머지는 3∼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전원 불복, 항소했고 억울한 심정을 항소이유서와 소명자료를 통해 눈물겹게 토로했다.
당시 항소심의 주심을 맡은 나는 곧 이들이 허위 제보에 의해 무리하게 긴급체포됐고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했으며 범죄사실을 뒷받침할 증거가 전혀 없음을 알게됐다. 대부분 충남 공주에서 살던 이들은 직업이 없거나 있어도 농업에 종사하는 등 형편이 어려웠다.
다만 외로운 처지에 있는 이들이 친목을 위한 계를 조직해 계룡산과 갑사 등 유원지에서 유흥을 즐기고 간혹 취기에 빠져 김일성을 찬양하거나 불순한 노래를 부르기도 한 사실은 드러났다. 나는 이들의 행위에 대해 경범죄는 적용할 수 있겠지만 국가보안법 등은 결코 적용할 수 없고 따라서 이 점에 대해 무죄를 선고, 억울함을 벗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불이익이 올 수도 있었지만 나는 양심과 인권 옹호를 위해 법관직을 걸고 소신을 관철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수차에 걸친 합의 과정에서 나는 그같은 뜻을 줄기차게 호소, 결국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법정은 눈물바다가 됐다. 피고인들은 “만세”하며 서로 껴안고 기뻐했다. 검찰은 불복,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무죄 판결의 이유가 워낙 분명해서인지 내게는 별다른 불이익도, 시비도 없었다. 다만 81년 4월 이유없이 법관재임명에서 탈락한 데는 이 사건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 뒤 그들로부터 가끔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은 적은 있지만 어떻게 지내는 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 사건을 생각해면 가슴뿌듯하고 긍지와 보람을 갖게 된다.
/김상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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