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새뮤얼 노아 크레이머 지음/박성식 옮김·가람기획 발행“얘야, 이제 철 좀 들어라. 공공장소에서 서성거리거나 길에서 배회하지 마라. … 거리에서 배회하는 네가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느냐? ” 탈선의 길에 든 아들에게 늘어놓는 아버지의 애정어린 훈계. 2000년 한국의 아버지 심정과 다를 바 없는 이 글은 바로 3700년전 수메르인이 남겨놓은 것이다.
한 학생이 학교에서 매를 맞고 돌아온다. 아버지가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 선물을 주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자 선생님은 아이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수메르인이 남긴 역사상 최초의 ‘촌지’에 대한 기록이다.
기원전 3000여년께 쐐기문자(설형문자)를 발명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수메르는 고고학이 증명한 인류 최초의 문명이다. 1896년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위치한 수메르의 존재가 학계에 정식으로 표명된 이래 계속된 수메르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고고학의 최대 발견으로 일컬어진다. 인류 역사 ‘최초의 것들’이 수메르 학자의 연구분야가 된 셈이다.
1955년 저술된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가람 기획)은 바로 5,000년전 이룩된 수메르 문명에 대한 해독서이자, 아울러 인류 역사 최초의 것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저자는 수메르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펜실베니아대 교수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 그는 수메르인이 남겨놓은 방대한 점토판의 기록을 해독, 학교·촌지·청소년 문제·양원제·세금감면·법전·판례·의학서·사랑노래 등 전 분야에 걸친 최초의 역사적 사실, 39가지를 추렸다.
기원전 1750년에 공포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 최초의 법전이라는 것은 1945년까지의 이야기이다. 고고학은 그보다 300년이 앞선 수메르의 우르_남무 법전의 존재를 알렸다. 물론, 더 앞선 법전의 발견이 있을지 모른다. 수메르 발굴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판례도 흥미롭다. 남편의 살인자를 신고하지 않은 ‘침묵한 아내’에 관한 재판이었다. 수메르 법원은 남편이 아내를 부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가 침묵한 것이 정당화된다고 판결했다.
인류 최초의 속담은 어땠을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에게 “성교없이 애를 배고, 먹지 않고 살찔 수 있는가!”라고 일침을 가한다.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죽기로 작정했다면, 낭비하라. 오래 살려면, 절약하라”라고 정리했다.
수메르 문명은 성경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성서의 낙원이 수메르 낙원신화와 유사할 뿐 아니라, 대홍수 신화도 서로 비슷하다. ‘이브’에 관한 궁금증도 수메르의 신화가 설명해준다고 한다. 이브는 왜 하필 갈비뼈로부터 만들어졌는가? 수메르 단어 ‘닌-’는 ‘갈비뼈의 고귀한 여성’이란 뜻과 함께 ‘생명을 만드는 고귀한 여성’이란 뜻을 지닌 동음이의어였다. 바빌로니아의 유명한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도 수메르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역사의 아득한 경계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때론 현기증도 감수해야 한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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