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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공산화 25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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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공산화 25주년

입력
2000.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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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심판 여전히 난제크메르 루즈 게릴라가 ‘어둠속으로부터 해방’을 외치며 프놈펜을 함락, 캄보디아를 ‘킬링필드’로 만든지 17일로 25주년이 됐다.

학살의 연출자 폴 포트가 1998년 자살하는 등 크메르 루즈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당시의 악몽이 캄보디아 곳곳을 휩싸고 있다.

1975년 4월17일 오전9시 마오쩌둥(毛澤東)주의를 표방하는 공산 게릴라들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프놈펜에 입성했다. “젊은 병사들이 프놈펜에 행진해 들어오던 첫날은 역사적인 날이었다”고 로 후이쿤이란 여인은 AFP 통신에 말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에 대한 시민들의 착각은 불과 수시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해방자’들은 프놈펜 입성직후 시민들을 ‘국민 개조’라는 명분으로 시골로 추방하기 시작, 집단학살극의 막을 열기 시작했다.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군과의 싸움에서패할 때까지 꼭 3년 8개월 20시간동안 지식인 정치인 군인 등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여만명을 살육했다.

프놈펜 외곽에 위치한 중엑이란 마을에는 지금도 반동으로 몰린 사람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 수없이 매장했던 구덩이들이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다

. 6,000여명이 넘는 이 ‘학살캠프’의 100여 구덩이에서 발굴된 9,000여개의 해골은 이곳 추모관에 보관돼 그날의 비극을 웅변해주고 있다. 캄보디아 전역에는 아직도 이같은 학살 구덩이들이 산재해있으며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아카데미상 수상영화 ‘킬링필드’의 실제 주인공으로 프놈펜 함락전까지 군의관으로 일했던 하잉 응로르는 물고기를 훔친 그의 친척을 크메르 루주가 인민재판에 회부해 구타한뒤 간을 꺼내 요리해 먹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캄보디아의 비극은 두가지 잘못에 의해 비롯됐다. 지도자들의 끝없는 권력투쟁과 미국의 실책이었다.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캄보디아는 지금까지 노르돔 시아누크(중립)-론 놀(친 미국계)-폴 포트(친 중국계)-헹 삼린(친 베트남계)-유엔 과도통치-시아누크(중립)로 지도자가 바뀌면서 이데올로기의 교차 속에 국가로서의 방향감각 마저 잃고 두차례의 인도차이나 전쟁에 휘말렸다.

미국은 월맹군이 캄보디아 영토를 통해 월남쪽으로 병력과 전쟁물자를 나르던 호치민(胡志明) 루트를 분쇄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캄보디아에 우파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지원했으나 나중에는 방조함으로써 비극을 자초하고 말았다.

미국은 특히 베트남전 당시 캄보디아 동부지역에 대한 폭격으로 캄보디아인 다수를 숨지게 한 사실이 있다.

크메루 루주는 이제 사라졌다. 1998년 4월 최고지도자 폴 포트가 사망하고 12월 정치지도자 키우 삼판과 이론가 누온 체아가 훈센 총리에 투항한데 이어 지난해 3월에는 킬링필드 비극때 ‘도살자’로 통했던 타 목이 체포됨으로써 사실상 크메르 루주는 완전 궤멸된 셈이나 다름없게 됐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지금 크메르 루즈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주저하고 있다.

서방세계는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대해 르완다나 보스니아 방식의 국제 전범재판을 요구하고 있지만, 훈센 총리는 게릴라전 재발을 막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방식의 진상조사를 통한 ‘역사적 화해’를 선호하고 있다.

훈센 정부는 키우 삼판과 누온체아를 사면하는 등 재발할지도 모를 킬링필드의 회오리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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