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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게 질린 체념의 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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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게 질린 체념의 객장

입력
2000.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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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에 가까운 폭락장세가 펼쳐진 17일 증권사 객장은 뜻밖에 차분했다.오히려 평소보다도 적은 투자자들이 증권사 객장을 지켰고 여느 때의 항의나 고함도 이날은 별로 들리지 않았다. 미리 마음을 다잡고 나온 듯 파란불 일색의 전광판을 망연히 바라볼 뿐인 투자자들의 얼굴에는 더이상 어찌해볼 수 없다는 체념이 짙게 깔려 있었다.

○…대우증권 일산 마두지점. 장 출발과 함께 곧바로 종합주가지수가 90포인트 가까이 빠졌을 때도, 오전 9시4분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돼 주식매매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투자자들은 그저 “올 것이 왔다”는 정도의 반응만 보였다.

박주창(朴柱昌) 지점장은 “예전 같으면 애업고 나온 아주머니들이 거칠게 항의하며 팔아달라고 아우성칠 텐데 고객들도 이미 예상했는지 담담하게 관망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된 직후 한때 투자자들로부터 “그게 도대체 뭐냐”고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

거래소 관계자는 “갑작스런 거래정지로 오전 한때 전화가 폭주한 것을 제외하고는 투자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평온한 편”이라며 “향후 전망을 묻는 전화가 가끔 올 뿐”이라고 전했다.

○…한숨과 뽀얀 담배연기로 뒤덮인 객장 안에서 투자자들은 말못할 사정들을 털어놓으며 위로를 주고받았다.

주당 28만원에 매입한 새롬기술 주식이 4만원대로 폭락했다는 김모(51·여·서울 광진구 화양동)씨는 “자식들이 애써 번돈을 날리고 나니 숨쉬며 밥먹는 것조차 민망하다”며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고개를 떨궜다.

서울 명동의 한 증권사 객장을 찾은 이모씨(57·은평구 홍제동)씨는 “시누이와 사위 돈까지 끌어들여 투자했는데 몽땅 날리게 됐다”며 “이불 뒤집어 쓰고 누워있기도 창피해 아침 일찍 집을 나와 헤매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일부 객장에서는 “도대체 정부는 뭘 했느냐”“나스닥과 한국증시가 왜 같이 가야 하느냐”는 등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왔고 증시를 떠나겠다며 돈을 인출하는 투자자도 속출했다.

한 투자자는 “우리나라가 미국의 쉰한번째 주(州)임을 공식 확인한 날”이라며 “모두가 나스닥만 바라보며 묻지마 투기를 했던 결과”라고 자책했다. 모 증권사 객장에서는 하한가에 과감하게 주식을 팔아치운 일부 투자자가 주위로부터 “용기있다”“장하다”며 박수를 받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이날 인터넷 주식투자사이트에 가장 많이 오른 단어는 ‘공포’. “이렇게 무서울 줄 몰랐다. 팔 수도 없고 묶어 놓을 수도 없다. 이러다 이혼당할지도 모르겠다”“한오라기 달빛마저 없는 막막장세” 등 극도의 불안심리를 나타내는 글들이 올랐다.

‘mcrp’란 네티즌은 “매수주문도 없는데 하한가 매도주문을 왜 쌓아올려 자멸의 길을 택하느냐”며 개미군단들의 투매 자제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날은 언론책임론까지 등장했다. 여의도 B증권 본점 영업부를 찾은 최모(58·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씨는“언론이 요란을 떨어 투자자들을 주식시장으로 몰아넣었다”며 취재진들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인터넷에도 “폭락의 일등공신은 ‘검은 월요일’을 과장보도한 언론”이라는 글이 이곳저곳에 띄워졌다.

그러나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문제없다. 일시적인 심리적 패닉일 뿐이다”는 등의 희망적인 글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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