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시민연대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직도 피곤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16대총선에서 기대밖의 성과를 거둔 그들이지만 “또 하라면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만큼 지난 3개월은 육체적·심리적 압박에 억눌린 시기였다.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은 “한마디로 시원섭섭하다”면서 “시작부터 투표일까지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며 그동안 초조했던 심정을 밝혔다.
‘리스트’를 발표할 때마다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정치권의 조직적 반발과 항의를 온몸으로 받아낸 고통은 말할 필요가 없다. 위법시비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당했을 때는 그냥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더 큰 괴로움이었다. 조직의 한 기둥으로서 자신이 무너지면 후배들까지 함께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의와 욕설, 협박전화에 시달리다가 분에 못이겨 전화통을 집어 던지고 사무실을 뛰쳐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총선연대 사람들은 나름대로 ‘투쟁’에 이골이 났다. 그래서 맞서 싸우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특정인에게 낙선이라는 불행을 안겨줘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입장에선 감당키 어려운 번민이었다.
김기식 사무처장은 아버지처럼 모시던 한 인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낙천대상자로 분류됐으니 아예 공천을 신청하지 말라”고 전해야 했다. 최열 공동대표는 형을 위해 출마의 뜻을 접어야 했던 동생의 결정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얘기는 총선연대가 겪은 크고 작은 고뇌의 극히 일부분이다.
보람은 더 많았다. 거리홍보전에 나선 김사무처장에게 꼬깃꼬깃 접힌 5만원을 건네주던 70대 할아버지, 박원순 위원장에게 “꼭 찍어 줄테니 기호가 몇번이냐?”고 물어 웃음을 자아낸 할머니, “사무집기가 부족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며 중고 팩시밀리를 들고 사무실을 찾아온 중년부부…. 총선연대를 받쳐준 것은 바로 이름없는 서민들의 따스한 성원과 격려였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었던 시민운동인 만큼 성과도 컸지만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총선연대 사람들은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환경·교통·소비자문제 등에서 한 단계 더 성숙한 시민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보다 정확한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제2의 총선연대’ 활동을 기대해 달라”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보람과 아쉬움, 그리고 우리 정치에의 희망이 담겨 있다.
양정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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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2000/04/1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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