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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 사람] "여자도 종원이다" 이원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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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 사람] "여자도 종원이다" 이원재씨

입력
2000.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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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사람은 이원재(李源在·52)씨다. 언론이 직업없는 여성을 표현할 때 쓰는 말 그대로 ‘평범한 주부’다. 고등학교가 최종학력인 이씨는 1남2녀를 뒷바라지해온 어머니이자 남편의 사업이 IMF로 어려움을 겪자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가계를 도왔던 아내이다.또 남자형제가 없는 3자매의 맏이로 친정어머니가 아파 눕자 25년째 살고 있는 서울 영등포의 자그마한 집에서 세를 준 방을 빼내 어머니를 7년간 모시면서 병수발을 해야 했던 딸이기도 하다.

그런 이씨가 ‘투사’로 변했다. 그는 친정쪽 종회에서 종중재산인 임야를 매각한 대금을 남자 중심으로 분배했다는 사실을 알고 ‘여자도 종원이다. 여자에게도 돈을 나눠달라’는 투쟁을 하고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일가 여성 50여명과 두 차례 종회 사무실앞에서 노상시위도 벌였으며 지난 7일에는 종회를 상대로 ‘종회회원 자격 확인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돈’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돈’뒤에는 자존심이라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했다. 처음엔 ‘돈’때문이었지만 이제는 여성의 자존심이 이렇게 짓밟혀도 되는지를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그를 만난 자리에는 그의 동생 이원순(李源順·50)씨와 소송대리인인 황덕남(黃德南·43)변호사 등 두 명의 여자가 함께 있었다.

_이번 소송의 주된 목적이 뭐냐.

“시집간 여자들, 출가외인도 종원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시집갔다고 이씨에서 다른 성이 되었나. 종회 규약에는 ‘같은 선조의 후손으로 20세 이상이면 회원이 된다’고 되어 있다. 여자는 종원이 아니라는 구절이 어디 있나. 종원으로 인정되면 남자들에게 나눠준 만큼 돈을 요구할 것이다.”

_종회는 무슨 돈을 얼마씩 종원들에게 나눠주었는가.

“수지 등 용인 일대가 아파트단지로 개발되면서 종회가 이곳에 있는 종중재산 임야를 300여억원에 주택회사에 팔았다. 그 돈으로 20세 이상 남자에게는 1억5,000만원, 10세이상 19세 남자에게는 5,000만원, 10세이상 결혼안한 여자에게는 3,000만원, 1세이상 9세까지는 남녀구별 없이 1,500만원씩 주었다.”

(동생 이원순씨는 종회에서는 종회장학금을 만들어 남자의 후손에게만 주고 있으며 60세 이상 남자에게는 경로위로금도 지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_“출가한 여자들은 한 푼도 못 받은 건가.

“아니다. 2,000만원씩은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가 떼를 썼기 때문에 받은 것이다. 작년 5월 일가 모임에서 ‘친정 남자들 종중 땅 팔아 제대로 먹고 살게 됐다더라’는 말을 듣고 종회에 확인을 했더니 시집간 여자들은 분배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느냐, 우리는 후손이 아니냐’고 항의했더니 2,000만원씩을 준다고 해 받았다.”

_그렇다면 합의가 됐다는 건데 왜 다시 시위를 벌이고 소송을 내었나.

“우리가 돈을 받고 난 10일 쯤 뒤 종회에서 우리 문중으로 시집온 며느리들에게도 3,000만원씩 나눠주었다는 말을 듣고 ‘이게 아니다’는 생각들을 하게 됐다.”

_며느리들에게 돈을 나눠준 게 왜 잘못인가.

“사실 줄 돈도 없고, 줄 수도 없다는 종회를 여러번 찾아가 떼를 쓴 끝에 2,000만원씩 받고는 ‘앞으로는 좋은 일에 돈을 쓰세요’라며 웃고 나왔다. 그러고는 며칠 뒤 며느리들에게도 돈을 나눠준 걸 알고는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들도 돈을 달라고 했지만 없어서 안 주기로 했다. 그러니 딸네들도 이 것만 받아라’는 말도 들은 판이었다. 또, 며느리에게 주었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남자 것이 되지 않느냐. 어떤 며느리는 몫돈이 생겼다고 좋아했지만 곧바로 남편이 찾아서 자기 계좌로 옮겨버렸다는 말도 있었다.

오빠나 남자동생들 때문에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여자들이 마지막에 또 이런 억울함을 감수해야만 하는가.”(이때 동생 이원순씨가 “며느리에게도 돈을 주었다면 사위들에게도 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씨는 또 어떤 가장은 자신 몫, 부인 몫, 아들들 부부 몫, 시집 안간 딸 몫, 손자·손녀 몫까지 합해 20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지급대상이 ‘1999년 12월31일 이전에 출생한 자’로 정해지자 올 1월초가 출산예정일이었던 며느리가 제왕절개수술을 받아 출산일을 당기기도 했으며 이번 일로 딸이 아버지를 외면하고, 누나와 오빠, 남동생의 사이가 얼어붙다시피 한 집안이 나오는 등 웃지못할 이야기가 속출했다고 말했다.)

_이번 소송에 여성단체와 여성운동가들의 관심이 높다. 돈문제만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 남녀평등의 문제와도 관련있다고 보는 것 같더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맞다. 돈문제가 치사하다고 해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남자들이 자기네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한 여자들의 권리를 무시하는 데 대해 그냥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관심을 보여준 단체는 물론 모든 여성단체에 우리를 도와달라는 편지를 낼 생각이다. 지금 동생이 여성단체 주소록을 만들고 있다.”(황변호사는 이씨에 이어 “이번 소송은 유사소송은 물론 앞으로 남녀평등문제에 큰 획을 그을 것”이라고 말했다.)

_유사소송이라면, 다른 문중에도 이런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3월말에 우리가 종회건물 앞에서 시위를 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심씨, ○○한씨, ○○박씨 등 용인지역 여러 문중 여자들이 ‘우리도 같은 처지다. 서로 돕자’는 전화를 해왔다. 어떤 문중여자 7명은 벌써 소송을 제기, 지난 6일 첫 재판이 열렸다.

첫 재판에 가보았더니 그들은 소송비용이 없어 변호사 없이 소송을 직접 하고 있더라. 재판을 어렵게 진행하고 있고, 자신도 없어보이는 것 같아 ‘제발 끊어지지만 않게 해달라’고 말해주고 왔다.”

_끊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게 무슨 말인지.

“일심에서 지더라도 포기하지 말라. 앞으로 전국에서 많은 여자들이 지켜보게 될 것이다. 우리 권리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한 것이다. 다음 재판에도 찾아가 격려할 것이다.”(그는 이날 재판을 지켜보았더니 판사가 ‘이런 재판에서는 증거가 많아야 한다’고 말하더라면서 종회에서 돈을 보낸 입급표 등을 보여주었다.)

_전에도 여성운동에 관심이 있었나. 이번 소송에 관심을 끌기 위해 이 문제를 여권신장운동과 일부러 관련시키는 건 아닌가.

“무슨 소리냐. 우리 부모가 딸만 셋 낳은 죄로 우리가 고생한 것 다 말할 수 없다. 사회가 이런 식이라면 정말 누가 딸을 낳겠느냐. 대학 4학년인 아들에게도 ‘남자는 기득권을 보장받고 태어난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남자들의 기득권이 정말 질기고 단단한 것인지를 확인하게 됐다.”(이원순씨는 하도 설움을 겪어 시집가면 절대 딸은 안 낳겠다고 마음을 먹은 적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1남2녀를 둔 언니와는 달리 아들만 셋이다. 황변호사도 거들었다. “솔직히 말해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여성운동에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 가운데도 이론보다는 몸으로 문제를 겪은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이들도 생활 속에서 불합리와 불평등을 겪으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_소송은 당신 외에 4명이 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떤 관계인가.

“우리가 알기로는 시집간 딸네들이 80여명은 되는데 우선 53명만 같이 움직이고 있다. 칠순이 되어가는 고모들과 4촌, 6촌 자매 53명이다. 나머지는 연락이 안되거나, 친정 남자들로부터 ‘딸네들이 소송에서 이기면 너네들도 받을텐데 나설 것이 뭐 있느냐’는 등의 회유를 받고 있거나, 소송비용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53명중 5명만 소송을 낸 것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래도 소송비용은 53명이 공동부담하기로 했다. 올해 예순일곱인 고모 한 분은 우리보다 이 문제에 더 흥분하고 계신데 집이 인천이어서 내가 대표 노릇을 하고 있다.”

_53명이 어떻게 모였나. 당신이 주동한 것인가.

“아니다. 종회에서 2,000만원씩 받으러 나오라고 해서 좋아라고 나온 사람들이 남자들은 1억5,000만원씩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자연스럽게 모였다. 나보다 나이 많은 고모나 언니들 가운데 그 날 이후 ‘여자로 태어난 게 이렇게 죄가 되는가’며 잠을 못 이루는 사람도 많다.”

_재판은 이길 것 같은가. 황변호사는 어떻게 만났나.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사람이 많다. 황변호사를 만나기 전 남자변호사들을 여럿 만났지만 대법원 판례로 미뤄 이기기 힘들다는 말들을 했다. 그러다 누가 황변호사를 소개해주었고 황변호사는 첫 마디에 사건을 맡겠다고 했다.”(황변호사는 ‘종친회 회원은 남자여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지만 이는 종친회 임원자격에 대한 판례이지 종회 구성원의 자격을 따지는 이번 소송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황변호사는 또 “여자들이 그동안 종회활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문제가 쟁점이 될 수 있겠지만 그건 남자들이 종회활동을 주도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여자들이 믿고 맡겨온 것이지, 이번 일처럼 여자들을 권리관계나 종회 구성원의 지위에서 몰아내도 된다는 것을 묵인하겠다는 취지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_남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이원순씨)“우리 남편이 원래 굉장히 엄했다. 아들들에게 운동화를 빨게 하는 걸 보고는 ‘사내 애들에게 그런 것을 시키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는데 요즘은 내 입장을 이해해주는 것 같다. 전에는 집안일은 아무 것도 안했는데 요새는 쓰레기도 버려주고 밥상도 치워주는 등 많이 달라졌다.”

_재판기일은 잡혔는가.

(황변호사)“아직 잡히지 않았다.

_이겨서 돈을 받게 되면 무얼 할 것인가.

“일부는 반드시 여성운동기금으로 사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우리보다 억울한 여자들을 돕기로 했다.”

_종회는 이미 돈을 다 나눠주지 않았나. 재판에서 이기면 남자종원들에 준 돈을 돌려받아 여자들이 나눠야 되는데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아직은 나눠줄 돈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인터뷰를 마친 기자에게 황변호사는 “지금까지 남녀문제는 취업, 승진 등 눈에 보이는 것에 국한됐지만 이번 소송은 혈연집단 내의 남녀불평등, 가정에서의 여성의 지위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어서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또 이번 소송은 결과가 어떻게 나더라도 아직은 우리사회에서 남녀평등이라는 게 피상적인 것임을 알려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국 부국장 soongchung@hk.co.kr

■[정숭호가 만난 사람] 종회의 반응

기자는 이원재씨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종회의 반응을 얻기 위해 수원에 있는 ○○이(李)씨 ○○○파 종회사무실로 전화, 자신을 종회 총무라고 밝힌 사람과 통화를 했다. 종회회장과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나눠준 돈은 반드시 여자에게도 나눠줘야 하는 상속재산이 아니다. 재산을 처분한 돈을 나눈 것이므로 증여를 한 것이다. 실제 남자들은 증여세를 뗀 1억3,000여만원을 받았고 시집간 여자들에게는 종회가 대신 증여세를 198만원씩 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번 일로 우리도 속이 탄다.

종중 임야를 매각한 용인의 여러 문중 가운데 시집간 딸들에게 돈을 준 것은 우리 밖에 없다. 이때문에 다른 문중에서 ‘당신들은 무슨 돈이 많아서 딸네들에게도 돈을 주었느냐’며 항의를 엄청나게 해오고 있다”고 밝혔다. “어떤 종회회원들은 2,000만원씩 나눠준 돈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말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에 이길 수 있다고 보는가고 묻자 그는 “종회는 선조를 모시기 위한 것이다. 여자가 시집가면 남의 식구다. 대법원 판례도 있다. 남녀차별을 왜 하느냐고 하지만 시집가면 타성이 되는 것이고 그 집의 관례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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