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또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일 뿐’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전쟁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역사의 재앙이었다. ‘전쟁은 악’이라고 강변해도 전쟁은 유령처럼 주기적으로 우리를 괴롭혔다.지금은 전쟁이 없는 이상사회에 대한 집착보다는 그 존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아픔을 어떻게 최소화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관심을 돌려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참전용사, 전사자와 부상병 그리고 그 유족들이 살아 있고 조국이 분단된 상황에서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며 잊을 수 없는 악몽이다.
동시에 한국전쟁은 우리고 극복해야 할 업보이다. 한국전쟁을 현재의 시각에서 재조명, 재평가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편집자주]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21세기 조망
申福龍(건국대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한국전쟁은 그 개전 이유와 책임이라는 면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논쟁이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이념의 산물이었고 그로 인한 아픔이 컸기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고 개전의 책임을 탓하는 일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도 우리는 누구를 정죄(定罪)하고 심판하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으며 이 과정에서 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더듬어 보는 작업을 소홀히 했다.
개전 책임과 비난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남침인가 북침인가를 따지는 문제로 비화되었다. 암울한 우익의 시대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등장한 수정주의자들의 북침논리는 김일성(金日成)에게 면죄부를 주는 데 이용되었고, 전통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폭압을 은폐하고 지속하기 위한 도구로 김일성의 남침설을 끝없이 이용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1950년 6월25일의 전면전은 김일성의 결심사항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면 개전 3일만에 자신의 수도를 빼앗기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문민정부의 출현과 자유화물결이 일어남에 따라 수정주의가 고개를 숙이자 재수정주의라는 것이 등장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내재적 모순에서 찾음으로써 전쟁의 내란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들은 남북전쟁이나 베트남전쟁이 누구에 의해 발발되었느냐를 묻지 않는 것처럼,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해방정국의 내재적 모순 속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으면서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21세기에 진입하는 지금에 와서 우리는 ‘그날 이후’를 탐구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조가 일어나고 있다. 1950년이후 50년의 한국사는 한국전쟁의 결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새로운 연구자의 논지이다. 이러한 주장은 개전의 책임 추궁에 목을 맸던 그간의 연구풍토에 대한 또다른 자성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조정래(趙廷來)의 소설 ‘불놀이’에는 한국전쟁 중에 겪었던 제트기의 폭음이 두려워 아직까지도 큰 소리만 들리면 교탁에 몸을 숨기는 노교수와, 시체 더미를 본 후로는 어른이 되어서도 야뇨증에 시달리는 지서 주임의 얘기가 나온다.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에게 전쟁은 천 길 업장이었고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깨어나는 악몽이었다. 그 긴 기간에 우리에게 강요된 것은 미움뿐이었다. 암울하고도 긴 좌익과 우익의 삶을 강요받으며 살아온 우리들은 고집스럽게도 서로를 사갈시(蛇蝎視)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것은 어쩌면 오랜 군사 문화 속에 살면서 숙명적으로 강요된 굴레일 수도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사회과학이 이 문제에 대하여는 한결같이 반공이어야 했고 누구도 공산주의 또는 공산주의자에 대해 설령 동족이라는 이름으로써도 연민을 나타내서는 안된다는 절대 금기 속에서 남한사람들은 살았다. 그 괴로운 반세기 동안에 오직 문학하는 작가들만이 좌우익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행복했다. 사회과학자들이 그런 말을 했더라면 벌써 몇 번은 지하실에 끌려갔을 그런 내용들을 작가들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점을 사회과학자들은 몹시 부러워했다.
적어도 남한이라는 좁은 시각에서 본다면 한국전쟁의 개전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그것은 ‘고요히 잠든 일요일 새벽, 남침 야욕에 사로잡힌 김일성의 침략’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한 줄 짜리 설명은 국정교과서와 각종 홍보책자에 명기된 개전 이유의 전부였다. 그리고 이 단순한 명제는 끝없이 우리를 세뇌했고, 이제 우리는 이에 익숙해져 있다.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책임이나 피아간의 살육을 둘러싼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추궁도 이 명제 속에 모두 묻혔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이나 전개과정을 학술적으로 검토하노라면 개전 책임은 물론 그 수행과정과 전후 처리과정에 관하여 남북한 모두가 진실하지도 않았고 정직하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미국은 개전 사실은 물론 첫 공격 지점과 개전 일자까지 사전에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1950년 6월 24일에 남한의 17연대가 이미 옹진반도의 해주(海州)에 있었던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미군이나 서북청년회와 같은 우익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휴전 협정의 조인 1분전까지 자행된 미군의 무익한 북폭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우파 사학자들은 기이하리만큼 침묵했다.
북한의 입장에 대한 의혹도 여전히 산적해 있다. 김일성은 개전을 앞두고 왜 그토록 뻔질나게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다녀왔으며, 소련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왜 한국어로 교신했으며,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구원한다)’라는 단순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중공의 참전과, 그로 인한 엄청난 출혈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며, 미연방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북한 노획 문서’중의 각종 작전명령서를 북한 사학자들은 언제까지 부인할 수 있으며, 소련의 붕괴 이후에 흘러나오는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문서가 보여 주고 있는 스탈린의 암묵적 교사(敎唆)를 어떻게 덮을 수 있을까?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한국전쟁에 관련된 의문들은 영구 미제 사건이 아니다. 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자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의 해석이 아직도 피차의 체제 유지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은 모두가 자신의 체제 구축을 위한 구실로 적의 존재를 필요로 했고 또 그 위험성을 과장했다. 당시 남북한은 서로에게 필요악이었다. 그들은 독립국가 건설의 초기에 나타나는 갖가지 모순들을 일거에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전쟁이 필요했다.
민중의 단결심, 가상의 적에 대한 적개심을 국가 건설에 필요한 에너지로 전환해야 했던 당시의 국내적 피폐함, 조국의 통일을 나의 손으로 이룩하겠다는 빗나간 공명심, 타협에 의해서 통일국가를 이룩할 수 없다는 절망감, 빨치산의 활동으로는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지정학적 상황, 미국의 호전성을 과소 평가한 김일성의 오판과 실수 등이 중층적(重層的)으로 모순을 상승(相昇)시켜 1950년 초가 되면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에게도 한국전쟁은 기다리던 놀이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이미 5년의 세월이 지나 군수산업이 불황에 허덕이고, 호전적 서부 개척정신을 발휘할 곳을 못찾아 국민들은 무료에 빠지고, 공산주의의 침략성을 입증함으로써 냉전에서 우위를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공산주의의 도발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는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이 호언장담한 것처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낙엽지기 전에 한반도를 적화시킴으로써 극동을 집는 집게의 한쪽 날인 한국을 공산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다. 그것은 역사의 숙적인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상륙해 있는 미국의 힘을 절반쯤은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전쟁이 남기고 간 것들
전쟁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역사의 재앙이었다는 처음의 얘기로 되돌아가 가서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한국전쟁은 역사의 필연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피할 수도 있는, 그리고 피했어야 할 인재(人災)였다. 이런 점에서 한국전쟁은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을 만난 잘못된 전쟁’이었다. 아픔이 아직도 너무 가까이 있기에 우리의 뇌리 속에 남은 한국전쟁은 폭격, 살육, 부모 형제의 사별과 동기간에 대한 그리움, 피난 길, 갈 수 없는 고향 등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반세기가 지난 지금 체험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역사로서의 전쟁을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것은 통일을 적어도 1세기 이상 늦추었다는 점일 것이다. 1950년의 냉전적 상황과 국내 정치세력의 이기적인 생각, 그리고 정치적 역량의 미숙을 고려할 때 통일이 목전에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통일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분단의 원인이나 통일의 저해요인은 우익들이 구두선처럼 되뇌는 냉전의 상황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파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은 분단상황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담론은 이제 통일을 위한 고뇌의 장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이다.
신복룡 /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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