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한 사변을 성사시키려 왔습니다.” 지난달 17일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위한 비밀 접촉을 가질 당시, 송호경 북측 대표가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에게 던진 말이다. 이 말이 정상회담 성사 후일담으로 화제에 올랐다. 박장관은 폭탄 선언을 하려나 싶어 무척 당혹했다지만, ‘사변’에는 원래 ‘중대한 일’이란 의미가 내포돼 있다. 남한에선 6·25 ‘사변’만이 부각되어 이 의미가 사장된 데서 발생한 에피소드였다.북측의 송대표가 회담을 끝내며 “임차(가까운 시일 내에) 연락하겠다”고 한 말도 박장관은 언뜻 이해 못해 뜻을 되물었다고 한다.
남북한 문화를 비교할 때 곧잘 대두되는 문제가 남북 언어의 이질화다. 한편에서는 경상도 방언과 전라도 방언이 조금씩 다르듯이 큰 틀에서 볼 때 문제될 게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분단 50여년 동안 음성, 음운, 형태, 의미, 어휘 등에 걸쳐 남북한이 나름의 변화를 겪으며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국립국어연구원이 북한에서 발간된 장편소설 24권에 쓰인 어휘를 조사한 결과 우리와 다르게 쓰이거나 아예 없는 단어가 2,510개 가량이 발견됐다고 보고한 바 있다. ‘머리가 좋다’를 북에서는 ‘골이 좋다’로, ‘대학가기 어렵다’를 ‘대학가기 바쁘다’로 쓰고 있고, ‘긴장하다’는 말은 ‘매우 긴요하고 절실하다’는 의미로 통한다는 것.
이런 차이는 북한 지역의 방언적 특성이 표준 언어로 승격되면서 생긴 데서 온 측면도 있지만, 1964·1966년의 김일성 교시에서 구체화한 말다듬기 운동, 문화어운동 등 의식적인 언어정책이 중요한 요인이 됐다.
그 주내용은 한자어와 외래어를 정리하고 고유어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우리말로 굳어버린 한자어와 외래어 등은 예외로 하면서 1966년부터 본격적인 말다듬기 운동을 벌여 상전을 ‘뽕밭’, 헬리콥터를 ‘직승기’, 브래지어를 ‘유방띠’,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 등으로 바꿔나가 1982년께는 정리한 어휘 수가 무려 5만어에 달했다. 1986년에는 말다듬기의 무리를 깨달아 ‘가슴띠’(브래지어)로 수정하거나, 아이스크림 등은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등 2만 5,000여개의 다듬은 말을 폐기해 버렸지만 궁극적으로 고유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언어정책 밑바탕에는 민족의 고유한 말과 글을 살려, 인민 대중의 지향과 감정에 맞게 말하고 글을 쓰자는 사상이 깔려있다. 고려대 최호철 교수는 이런 말다듬기 운동에 대해 “어려운 말을 쉬운 우리 말로 고쳐나갔고, 또한 국어의 조어력에 대한 실천적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고 평가했다. 또한 학계에서는 남북언어의 이질화 원인이 남한의 외래어 정책에 있다는 지적도 있다.
남북언어의 이질성 문제와 관련, 1996년 중국 창춘(長春)에서 남북 국어학자들이 모여 토론한 적은 있지만 이후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태여서 남북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 이 부분에 대한 공동연구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은 지난해 말 표준국어대사전을 발간하면서 북한에서 주로 쓰는 어휘 9만여개를 포함하고 ‘북한어’라고 표시했다. 또 남북한언어비교사전 출간도 추진중이다.
/송용창기자
입력시간 2000/04/1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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