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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朴문화가 밝힌 협상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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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朴문화가 밝힌 협상전모

입력
2000.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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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밀 회담은 3월 17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시작돼 4월 8일 베이징(北京)에서 결실을 맺기까지 23일이 걸렸다.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장관은 3월 15일 남측 특사로 지명돼 북측 특사인 송호경(宋浩景)북한 아태평화위원회부위원장과 상하이에서 4차례, 베이징에서 2차례 등 모두 6차례 극비 회담을 가진 끝에 합의문에 서명했다. 11일 박장관의 기자간담회를 통해 밝혀진 비밀회담 추진 과정과 뒷얘기를 일자별로 정리한다.

■3월 15일

박장관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으로부터 긴급호출을 받고 청와대 관저로 올라갔다. 김대통령은 박장관에게 “북한이 3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상하이에서 만나자. 특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며 “특사 임무를 맡아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박장관은 “저는 공개된 인물이고 남북관계 전문가가 아니므로 통일부장관이 맡아야 합니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통일부장관이나 차관이 특사로 가면 비밀회담 사실이 공개될 것이다. 이번 만큼은 박장관이 가라”고 다시 한번 지시했다.

■3월 17일

박장관은 오전 9시 20분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해 상하이로 향했다. 문화관광부 간부들에게는 ‘건강 검진을 위한 휴가’라고 말해뒀다. 신분노출을 우려해 비행기 예약시 영문이름을 ‘Jiewon’대신 ‘Jeiwon’으로 기록해 ‘제원’으로 읽히도록 했다.

박장관은 귀빈실 대신 일반 탑승수속 창구를 이용했다. 자신을 알아 본 법무부 직원들에게는 “개인적 볼 일이니 신경쓰지 마라”고 말했다. 기내 화장실도 승객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다녀왔다.

오후 4시 상하이 시내 호텔에서 송호경 부위원장과 처음으로 대좌했다. 박장관은 “나는 남북관계는 잘 모르지만 한반도의 화해·협력·평화 유지의 필요성과 인도주의적 교류에 대한 김대통령의 ‘진심’을 가지고 왔다”고 말문을 열었다. 송부위원장은 “나도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상부의 뜻’을 받들어 분단 50년 만에 ‘중대한 사변’을 성사시키려 왔다”고 화답했다.

박장관은 순간 ‘중대한 사변’이라는 표현에 긴장했다. ‘이들이 무슨 폭탄선언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정확한 뜻을 묻자 송부위원장은 “‘역사적인 사건’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시기는 의외로 쉽게 결정됐다. 박장관이 “언제 정상회담을 가질 것이냐”고 묻자, 송부위원장은 “빨리 하자. 6월이면 좋겠다”고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박장관은 수첩을 훑어본 뒤 “그러면 6월 12~14일에 하자”고 마무리를 지었다.

■3월 18일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비밀 회담은 이날 구체적인 협의에 들어가면서 합의문 초안의 내용과 단어 문제로 난관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우선 북한측은 합의문에 ‘김정일 국방위원장’대신 ‘최고위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김대통령의 취임사와 베를린 선언의 내용을 상기시키며 “정상회담이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이뤄진 것임을 분명히 하자”고 했다.

박장관은 ‘최고위자’라는 표현을 명기할 경우 정상회담에 김정일 대신 대외적인 국가원수인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나올 수 있다고 판단,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명기하자고 요구했다.

박장관은 또 “김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요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의 ‘초청’이 있어야 평양에 갈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의해’라는 표현도 요청했다. 양측의 이같은 입장 차이 때문에 결국 회담은 결렬됐다.

■3월 22-23일

다시 북한측의 협상 요청을 받은 박장관은 22일 차이나에어라인을 이용해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오후 5시 회담 직전 박장관은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협상이 의미가 없다”고 강경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북한측에 전달, 회담은 순연됐다.

북한측이 반응을 보인 것은 다음날 새벽 3시. 북측은 박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새벽 5시에 회담을 갖자고 요구, 다섯번째 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합의문 초안의 내용과 자구 문제 때문에 회담은 오전 6시 20분 다시 결렬됐다. 박장관은 “앞으로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한 뒤 전화를 달라. 이렇게 질질 끌려면 하지 마라”고 단호하게 입장을 표명했다.

■4월 8일

박장관은 전날(7일) “당신들 표현대로 할테니 다시 만나자”라는 북한 측 통보를 받고 이날 베이징으로 재차 날아갔다. 북한 측은 이전 회담과는 달리 이날 박장관이 묵은 차이나월드 호텔에 함께 투숙했다.

오후 4시 6번째 회담이 시작됐다. 북한 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는 표현을 명기하기로 양보했고 박장관은 상호편의주의에 의거, ‘요청’과 ‘초청’이라는 표현을 각자 합의문에 쓰기로 물러섰다. 이렇게 해서 북한측 합의문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남한측 합의문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의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마지막 걸림돌은 합의문 제목이었다. 북한 측이 직접 작성한 합의문 제목은 ‘보도문’이었다. 박장관은 “내가 대변인 생활을 10년 해봐서 이런 문제는 잘 안다. 역사적 합의문을 ‘보도문’이라 하면 남들이 웃을 것이다. ‘남북합의서’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장관의 주장은 3시간여 만에 관철됐다. 역사적 합의서에 서명하고 기념사진을 찍으니 저녁 7시 40분이었다.

이후 남북한 특사 일행은 베이징 시내의 회원제 식당인 장안구락부로 이동, 만찬을 가졌으며 폭탄주가 서로 오가는 등 시종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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