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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 못할 일] 우리 가족의 월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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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 못할 일] 우리 가족의 월남기

입력
2000.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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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봄 평양, 한 사내가 우리 집에 나타났다. 서울에 계신 아버님의 소식을 가져 온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러 서울에 가신 아버님이 크게 성공을 하셨고 직장만이 아니라 집까지 장만하셨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월남을 부탁하셨다는 거다.물론 우리 가족은 즉시 할아버지와 상의하여 월남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안되는 세간 살이를 정리하고 그 해 5월쯤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첫째 넷째 형과 같이 평양역에서 안내원의 지도를 받으며 남행 열차에 올랐다. 할아버지가 몰래 숨어서 한숨과 눈물로 우리를 배웅해주셨다.

우리 일행은 안내원, 첫째와 넷째, 어머니와 나 이렇게 따로따로 분산해서 앉아 있었다. 공안원한테 검문 검색을 당할 때를 대비해서다. 한 두차례 공안원의 검문 검색은 아슬아슬하게 잘 넘겼다. 그러나 38선을, 분단의 철조망을 돌파하기가 밥 먹듯이 그렇게 쉽겠는가. 드디어 사리원 역에 도착하기 전 나를 업고 있는 어머님이 불안과 초조함에 휩싸인 끝에 공안원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을 못하시고 걸리셨다. 갖고 있던 보따리 중 몇 개를 빼앗긴 채로 사리원 역에서 강제로 하차당했다. 졸지에 가족들과 생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망연자실한 어머님이 정신을 차려 생각해보니 사리원은 마침 큰 딸이 시집가서 매형과 함께 새살림을 시작한 곳이다. 주소도 모른 채였지만 어머님은 용기를 내어 사리원 여기 저기를 헤매셨다.

그 때 마침 리어카 끄는 인부를 만나 이것저것을 물어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누님 내외도 월남을 결심하고 신혼 살림을 정리하여 그 인부를 통해 다른 집으로 막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래서 누님 내외를 만나고 며칠을 수소문하여 새로운 안내원과 접선이 되고 또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낮에는 야산에 숨고 밤을 이용하여 38선을 넘었다.

안내원이 잘못 인도해서 밤새도록 걸어 38선을 넘은줄 알았더니 다시 그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온 일, 낮에 야산에 숨어 있을 때 내가 목이 타서 누이를 ‘냉이’로 부르며 물달라고 보채던 일, 또 나를 달래느라 할 수 없이 내 오줌을 받아 먹였더니 내가 도리질하며 그것을 안 먹던 일…

한 두 살 때 어머니와 누이의 등에 업혀 겪은 일이지만 이 모든 일들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집안 식구들이 모이는 날이면 기억력이 뛰어난 맨 위 누님이 이 38선 월남기를 두고두고 구술하였기 때문이다.

이 월남기는 한 가족의 분단사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는 전승이 안되는 월남 1세대 만의 경험담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한 가족의 분단에 얽힌 내력과 사연이 한 세대만의 기억으로 끝난다면 통일은 언제 올 것인가.

/김정헌·화가·공주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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