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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남북접촉 뒷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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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남북접촉 뒷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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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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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합의가 10일 발표되기까지 서울 평양 베이징(北京) 사이에서는 숨가뿐 협상이 전개됐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3월9일 던진 베를린선언은 북한의 화답으로 되돌아오고, 이어진 남북 밀사의 회담은 예상보다 빠른 결실을 맺었다. 그 과정의 우여곡절, 기대감과 우려는 “입술이 빠싹 탈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는 당국자의 소회처럼 간단치 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정상회담성사의 단서가 엿보인 것은 김대통령이 3월11일 유럽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김대통령은 황원탁(黃源卓)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보고를 받았다. “베를린선언에 대한 북한의 적대적 반응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통상적으로 북한은 막후에서 협상을 하더라도 우리 정부의 통일구상이나 발표를 일단 평가절하하는 게 상례였기 때문에 북한의 무반응은 희소식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우리의 정보채널, 현대 등 민간레벨, 미국 일본 등의 전언을 통해 북한 내부의 큰 변화조짐이 읽혀졌다.

그러나 북한은 ‘예측불허’의 집단이었기에 베를린선언 직후만 해도 정상회담의 ‘정’자도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김대통령은 가능성의 단서를 놓치지 않고 임동원(林東源)국정원장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 황수석 등에게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북한은 미래를 놓친다는 점을 설득하라”고 밀명을 내렸다.

며칠 지나 13, 14일께 당국간 채널을 통해 ‘만나자. 책임있는 인사를 보내달라. 장소는 상하이’라는 북한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남북관계를 다루는 고위당국자들 사이에는 흥분이 휘몰아쳤고 급보는 김대통령에 전달됐다. 고위당국자들은 “직을 걸고 일이 성사될 때 까지 입을 다문다”고 의견을 모았다.

○…김대통령은 북한의 메시지를 받고 총선출마를 포기시키면서까지 아껴두었던 박지원(朴智元)문광부장관을 15일 호출했다. 이날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베를린선언을 행동으로 실천해달라”는 논평을 냈다. 당시 한국 언론의 조명을 별로 받지못했지만 남북관계 전문가들 중에서는 “북한이 주민 200만명이 보는 노동신문에 긍정적 논평을 실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해석이 대두되기도 했다.

이처럼 뉴스의 사각지대 속에서 김대통령은 박장관에게 “중국에 가서 북한과 공존하겠다는 우리의 참뜻을 제대로 전하고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박장관은 “전문가가 아니다”고 고사했지만 김대통령은 “국정원장이나 통일부장관은 움직이면 노출돼서 일이 안된다”고 말했다. 박장관은 김대통령의 지시를 하나 하나 메모하고 임국정원장 박통일장관 황수석 등에게 협상의 구체적 내용을 코치받았다. 특히 김대통령은 “정상회담 때문에 변칙을 써서는 안된다. 변칙은 훗날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당부했다.

○…박장관은 3월17일 상하이에서 송호경(宋浩景)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만났다. 박장관은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에 한국인 출입이 적은 장소를 대화장소로 택했다. 박장관과 송부위원장의 첫 만남은 응수타진과 견제수로 상당히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박장관은 특유의 친화력과 설득력으로 “한국은 절대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김대통령의 뜻을 근거로 대가며 설명했다. 송부위원장은 처음에는 국가보안법 개정 등 의례적인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마음을 열지않았다. 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남북 밀사간 간격이 좁아졌고 박장관은 기대감을 갖고 귀국할 수 있었다.

○…박장관이 귀국후 전한 ‘상하이 협상’을 들은 김대통령은 고위당국자들에게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라는 당부와 함께 ‘GO’사인을 내렸다. 이후 남북협상을 오랫동안 해온 K씨 등 실무라인이 가동됐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세부적인 논의도 오갔다. 한 때 북한이 조건을 들고 나오기도 했으나 우리측이 원칙적인 수준에서 이를 다뤄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는 게 당국자들의 귀띔이다.

그러나 선거가 걸림돌이었다. 정부내에서는 북한이 선거후 정상회담에 합의할 것이라는 게 다수설이었다. 김대통령이나 당국자들도 선거전에는 어렵지만 선거 직후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할 것이라는 정보를 여러 채널을 통해 입수했다.

‘선거후 정상회담 합의설’은 7일 북한으로부터 전해진 ‘8일 베이징 회동’전문으로 뒤바뀌게 됐다. 당국자들은 “북한이 악화한 경제상황, 선거후 한국상황을 고려해 서둘렀다”고 말했다. 북한의 급박한 전문이 온 이후 임국정원장 방의 불은 밤늦게까지 켜져있었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도 새벽근무를 했다.

이미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하기로 마음을 먹은 탓에 박장관은 8일 베이징 협상에서 별다른 곡절없이 최종 합의문에 서명했다. 4시부터 시작된 회담은 7시25분 서명까지 3시간 이상 걸렸지만 분위기는 매우 부드러웠다.

○…당국자들은 정상회담 합의 발표를 10일 오전 10시에 하기로 북한과 합의했기 때문에 보안에 전력을 다했다. 9일 야당가에서 흘러나온 ‘중대발표설’을 토대로 일부 언론들이 이를 추적하자, 청와대 일부 관계자들은 “베를린 선언중 경협부분에 대한 발표가 있을 지 모르겠다”고 연막을 쳤다.

박장관과 임국정원장은 휴일인 9일 오후 김대통령에 보고한 이후 가급적 외부와의 연락을 끊었으며 황수석을 비롯, 당국자들은 일체의 질문에 “그런 일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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