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72)그루지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장기집권에 돌입했다.셰바르드나제는 이번 선거에서 82%라는 앞도적인 지지를 얻어 17%를 얻은 공산당 서기출신의 쥼베르 파티아슈빌리 등 5명의 후보를 눌렀다. 인구 500만명의 그루지야에서 셰바르드나제만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의 재선은 예고된 것이었으며 지지율이 얼마나 나올지가 문제였다.
구소련시절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외무장관으로 냉전체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셰바르드나제는 1992년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 초대 대통령이 유혈쿠데타로 쫓겨나자 같은 해 10월 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루지야 국정을 이끌었다.
그는 독립을 선포하고 무장투쟁에 나선 압하스자치공화국 반군 및 반정부활동에 나선 감사후르디아 전대통령 일파와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다 압하스 사태가 소강상태를 맞고 감사후르디아 전 대통령의 자살로 국가 안정의 토대가 마련되자 1995년 11월 대선에서 74%의 높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2년부터 1985년까지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로 그루지야의 1인자였던 그는 이번 대선 승리로 앞으로 5년동안 더 그루지야를 통치할 수 있게 돼 그루지야에서 그의 입지와 영향력은 더욱 확고부동하게됐다.
셰바르드나제가 재선에 성공한 주요 요인은 국제적 지명도. 외무장관 시절 맺은 서방 지도자들과의 인연으로 외채를 들여올 수 있었으며, 국제사회가 코카서스산맥의 이 조그만 산악국가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취임 당시 1,000%까지 치솟았던 인플레를 10%이하로 끌어 내리는 등 내전의 혼란에 있던 그루지야를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 서방 전문가들은 “1995년까지만 해도 극도의 혼란상태였던 그루지야의 안정을 되찾은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1995년 자동차 폭탄테러와 1998년 수류탄 테러로 죽을 고비를 두 차례나 넘기기도 했던 셰바르드나제는 이번 임기동안에 부패 척결을 통한 경제발전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떠안고 있다. 또 2005년 나토 가입을 약속하는 등 친 서방노선을 추진하면서 빚어진 러시아와의 미묘한 긴장관계를 원만하게 처리하는 것도 주요 현안중 하나이다.
남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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