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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덕에 이만큼 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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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덕에 이만큼 살았는데…"

입력
2000.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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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잿더미가 된 집 축사 안에서 시커멓게 그을려 숨진 열살배기 암소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던 김석용(金碩鎔·63·강릉시 사천면 석교1리)씨의 눈에는 끝내 눈물이 고였다.7일 돌연 축사를 덮쳐 자식같은 소 7마리를 태워 죽인 화마(火魔)가 도무지 현실같지 않았다. “언덕 너머에서 불길이 치솟은 지 불과 30분도 지나지 않았어. 축사에 불이 붙었지만 전기도 나가버렸는지 물펌프도 헛돌고…. 눈 앞에서 소들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다행히 불길이 고삐를 태워 준 여섯마리의 소들은 축사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김씨는 “축사를 빠져나온 놈들도 모두 머리에서 꼬리까지 불길이 옮겨 붙은 상태였다”며 “마치 불덩이가 튀어나오는 모습”이라고 끔찍한 순간을 회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축사 안에서 무릎꿇은 자세로 불에 타 죽은 암소였다. 김씨는 “일곱 아이를 무난히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이놈이 10년 동안 열심히 새끼(9마리)를 낳아준 덕분”이라며 “5년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처도 이놈을 가장 귀여워 했는데…”라고 울먹였다.

목숨을 건진 소들은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 뒤편 잡목더미 속에서 화상을 입은 채 서성이는 모습으로 발견됐다. 소들은 살갗이 녹아내려 눈도 뜨지 못한 채 구슬픈 울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이놈들도 가망이 없어. 차라리 죽는게 편할 거야.” 김씨는 간신히 불길을 피했지만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화상(火傷)’을 입었다.

강릉=이주훈기자

ju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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