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가스레인지 생산업체에서 명예퇴직한 K(47)씨는 컴퓨터란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18년간 기능직으로 일하다 지난해초 경리부로 배치됐는데 컴퓨터를 잘 몰라 결국 사표를 내고 말았다. “여직원에게 부탁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죠. 처음에는 선뜻 응해주다가도 나중에는 조금씩 눈치를 주더군요. 윗분들 눈초리도 따갑고….”인터넷 사용인구 1,200만명 돌파, 컴퓨터 보급 830만대같은 수사가 딴나라 이야기인 사람들이 있다. ‘컴맹’ ‘넷맹’이 그들이다. 대부분 40∼50대 직장인인 이들이 컴퓨터로 받는 스트레스는 사회병리현상이 된지 오래다.
지난 2월 행정자치부 과장급 간부 114명중 60여명에게 장관의 E_메일이 날아들었다. 내용인즉 “지식정보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공무원들은 퇴출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장관이 전날 보낸 E_메일에 답신을 하지 않았거나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40대의 A과장은 “기습적으로 메일을 보내놓고 답장 안했다고 호통 치는 것은 함정수사로 범인 잡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못마땅해 했다.
이런 나이탓 서러움은 삐삐와 핸드폰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따라가던 세대가 20세기말부터 거세게 몰아닥치기 시작한 정보화의 급류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으로 해석된다.
‘아버지의 전화’ 정 송(46) 대표는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아버지들의 하소연은 대부분 ‘그놈의 컴퓨터 때문에…’라는 한탄으로 끝난다”며 “컴퓨터와 인터넷에 밀려 중년층의 풍부한 경험이 사장되는 풍토가 걱정스럽다”고 지적했다.
컴퓨터는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을 가르는 또 하나의 장벽이 됐다. 정 대표 자신도 얼마전 고등학생 아들에게 문서작성을 부탁했다가 ‘그것도 못하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넷맹인 서울 A중 L교사는 “학교에서 개인홈페이지를 만들라고 해 고교생 딸에게 떠넘겼다”며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이들한테 영(令)이 안선다”고 털어놓았다.
젊은 세대라 해도 최신 게임이나 프로그램을 모르면 ‘왕따’를 각오해야 한다. 서울대 복학생 K(24)씨는 “요즘 PC방에 ‘출근도장’을 찍는다”며 “후배를 만나면 다들 게임 얘기뿐이라 학원 다니듯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공부한다”고 쑥스러워했다.
김태훈 진성훈 기자
■"컴맹 탈출 사회가 도와야"
컴맹과 넷맹들의 이런저런 서러움은 그들 자신만의 잘못일까?
공기놀이하며 자란 이들에게 플레이스테이션 2를 왜 할 줄 모르느냐고 일방적으로 핀잔만 줘도 되는 것일까? 미국에는 ‘넷 데이(Net Day·인터넷의 날)’가 있다. 일본에는 ‘그레이 아웃(Gray Out·중노년층 넷맹 탈출)’이라는 이벤트가 있다.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저소득층을 위해 인터넷을 깔아주기도 하고 중노년층에게 인터넷 접속법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행사다. 더불어 사는 사회 차원에서 ‘정보화 장애인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따뜻한 작업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도움장치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한달에 3만원만 내면 학원에서 컴퓨터를 배울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는 ‘주부 인터넷 100만명 교육’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진보네트워크 홍석만 조직팀장은 “알 권리는 정보화시대에 최소한의 기회평등을 위해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세대 김용학(사회학) 교수도 “정보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녹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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