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참으로 반가운 우리 시의 한 얼굴이 독일을 방문한 선배, 동료 문인들을 찾아 해후했다. 1988년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로 암울했던 시절 우리의 정서를 강인한 풀뿌리 의식의 정한 어린, 그러면서도 화려하고 세련된 언어로 벼려냈던 시인 허수경(36)씨. 허씨는 시인 김광규 김혜순, 소설가 한수산 신경숙씨가 함부르크에서 ‘한국문학작품 낭독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자 그길로 이들을 찾아왔다.
1992년 초 독일로 유학온 허씨는 지금 뮌스터대학에서 고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신경숙씨의 전화연락을 받고 “고속열차(ICE) 타고 2시간만에 달려왔다”고 허씨는 말했다. 반가운 문우, 선배작가들과 상기된 표정으로 껴안고 오랜만의 정을 나누는 허씨의 모습과 말투는 화장기 하나 없이 여전한 ‘진주 가수나’의 모습 그대로였다.
두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내고 그는 느닷없이 독일로 갔다. 고고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그야말로 맨손으로 와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올해 박사과정 2년째, 근동(近東) 고고학이 전공이다.
국내에서는 생각도 하기 힘든 분야다. 그간 시리아 지역의 고대문명 유적발굴 작업을 연간 2개월씩 두 차례 현장에서 해왔다. 올해 5월에도 3차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는 두번 다녀갔다. 1996년 이후에는 방문하지 못했고 신씨 등 문우들과 가끔 편지만 주고 받았다. “문학과 고고학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둘 다 인간의 근원에 의문을 갖고 탐구한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탈상’) . 자신의 시구처럼 그는 고추모를 옮겨심듯 자신의 삶을 먼 땅에서 심고 있다. 외롭고 힘들게 유학생활을 계속하면서도 그는 그간 국내 문학지에 시를 발표해왔다. 이르면 올해 가을쯤 세번째 시집이 나올 예정이다. 이틀을 함께 보낸 후 다시 뮌스터로 돌아가는 허씨나, 그를 배웅하는 작가들 모두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이별의 아쉬움으로 절절했다.
/함부르크= 하종오기자
해후의 정을 나누는 허수경씨(가운데)와 김혜순(왼쪽), 신경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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