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에게 자기개혁을 바란다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법과 제도의 손질만으로는 총수의 무한권력이 용인되고 승계되는 ‘황제경영’관행을 뿌리뽑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번 현대사태를 통해 적나라하게 입증됐다.재벌이 스스로 혁신할 수 없다면, 누가 개혁시켜야 할 것인가. 성균관대 이재웅(李在雄·경제학) 교수는 “정부가 직접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낡은 지배구조에 대한 최종적 감시는 시장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헌재(李憲宰) 재정경제부장관도 전횡적 경영의 기업은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주가가 떨어지고, 자금조달이 어려워져 결국 지배행태를 바꾸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시장에 의한 징벌’을 강조했다.
황제경영을 민주경영으로 전환시키는 시장의 힘은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서 나온다. 황제경영으로 10% 대주주(총수)가 100% 전권을 행사한다면 다른 90% 주주들는 그만큼 자신의 권리를 도난당한 셈이다. 고려대 장하성(張夏成·경제학)교수는 “결국은 다수주주들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나서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총수에 맞설 다수주주는 소액주주와 기관투자가다. 그러나 ‘모래알’같은 불특정다수의 소액주주는 오너독주를 견제할 정도로 ‘지분조직화’가 어려운 만큼 현실적 대안은 기관투자가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보험 투신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은 고객자산을 맡아 관리하는 만큼 투자한 기업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경영투명성을 감시하고 대주주 횡포를 견제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이영기(李永琪)박사는 “미국에선 기관투자가가 주총에서 적극적 의사표현은 물론 사외이사 추천을 통해 직접 이사회에도 참여한다”며 “기관투자가의 경영참여가 클수록 기업가치가 높아진다는 실증적 분석도 있어 우리나라도 지배구조 투명성을 위해선 올바른 기관투자가부터 육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보험 투신등 국내 기관투자가 자체가 대부분 재벌소유라는 점. 황제경영의 그늘아래 있는 투신·보험사를 통해 황제경영을 견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재벌의 제2금융권 소유제한은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사금고화) 방지 뿐 아니라, 황제경영의 종식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정부도 사외이사도입, 소액주주권완화, 사실상 이사제 등만으로 ‘법과 제도는 다 만들었으니 제도정착을 지켜보자’는 말만 되풀이할 상황은 아닌 것이다.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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