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은 거꾸로 달리고 있다. 재벌개혁의 최대 핵심인 산업·금융자본의 분리 작업은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정부의 재벌개혁 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재벌들은 소리소문없이 경제혈맥인 금융을 점령해 들어가고 있다. 금융구조조정의 뼈깎는 노력이 결국 재벌들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증권 보험 투신 등 제2금융가는 온통 재벌간판으로 뒤덮이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인 97년만 해도 22.5%(수익증권 수탁고)에 불과하던 현대 삼성 등 4대 재벌의 투신업계 시장점유율은 35.3%(2월말)까지 늘어났다.
29개의 크고 작은 생명보험사가 난립하던 생명보험시장도 삼성 SK 금호에 이어 현대가 입성에 성공,재벌중심의 시장쟁탈전이 예상되고 있다. 삼성과 LG가 36%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신용카드시장에는 현대와 SK 롯데 등 재벌그룹들이 줄줄이 뛰어들 채비다.
동일인 지분한도(4%)로 빗장을 걸어놓은 은행도 ‘주인찾아주기’라는 명분하에 언제든지 삼킬 태세를 갖춰놓고 있다. 이미 한미·광주·부산은행 등은 지분참여를 통해 교두보를 확보해놓은 상태다.
‘도대체 금융이 뭐길래…’. 증권과 투신 등 금융부문을 차지하기 위한 현대그룹 오너일가의 경영권 분쟁을 보면서 국민들은 재벌들이 금융에 왜 그렇게 눈독을 들이는지 새삼 고개를 흔들고 있다.
‘헐값에 부도채권 사주기, 싼 이자로 돈 빌려주기, 계열사 주가띄우기…’. 고객이 맡긴 돈을 빼내 부실계열사를 지원하고 총수의 지배권을 세습하기 위해 재벌 금융계열사들이 저지르고 있는 온갖 형태의 비리와 편법들이다. 재벌이 계열 금융기관을 사금고(私金庫)로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여신제재요? 재벌이 제2금융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은행을 통한 금융제재는 한계가 분명합니다”(A은행 여신담당 임원)
2금융권은 ‘재벌의 영토’다. 제2금융권은 지분제한도 없는데다 대부분 비공개 회사들이다. 그만큼 규제와 감시장치가 느슨할 수 밖에 없다.
재벌의 2금융권 장악의 폐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증시활황과 채권시장 활성화 등의 영향으로 2금융권의 시장규모는 은행권을 압도하면서 재벌의 최대 자금조달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박경서(朴景緖)고려대 교수는 “재벌의 금융지배를 방치해둔다면 재벌개혁은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며 “근본적으로 2금융권도 소유제한을 통해 재벌이 금융에 접근하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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