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눈썹, 미남형 마스크, 그러면서도 털털함이 물씬 풍기는 서민적 분위기…. 그라운드밖에서는 마음씨 좋아보이는 동네 아저씨의 인상이다. 그러나 승부세계에서 보여주는 그의 내면은 소신으로 똘똘 뭉친 강골이다.강병철(54)감독. 평소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 그지만 겉으로 봐서는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다. 표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얻은 별명이 ‘만만디’.
좀처럼 무리수를 두지 않는 ‘비둘기’면서도 일단 기회를 포착했을 때는 주저없이 강수를 두는 ‘매’가 된다.
당대의 명 승부사중 한명인 강감독이 1998년7월 한화사령탑에서 물러난 지 1년8개월만에 신생 SK의 지휘봉을 잡고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야구인생 39년째를 맞는 그의 야망과 뒤안길을 들어봤다.
_사령탑으로 복귀한데 대해 축하드립니다. 19일 저녁 통보받은 지 1주일이 지났는데 그동안 어떻게 보냈는지요.
“인사다니고 쌍방울의 전주 시범경기 관전 …. 현재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방법은 용병밖에 없기 때문에 쌍방울 용병들의 경기내용을 중점적으로 봤습니다.
현재 미국쪽에도 좋은 용병이 있는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괜찮은 투수가 한 명있다고 들었는데 현지에 가봐야 기량을 알 것 같습니다.”
_4월5이면 올시즌이 개막됩니다. 팀을 어떻게 꾸려나갈 계획입니까.
“법적으로 쌍방울구단은 29일부터 SK소속이 됩니다. 그래서 이날 선수들과 상견례를 처음 하게 됩니다.
그리고 4월1일 현대와 한 경기를 가진 뒤 곧바로 시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동안 감독생활을 해오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촉박한 일정관계상 선수들의 현 상태나 동계훈련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보니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일단 선수들과 함께 지내온 코치들에게 역할을 분담해 놓고 있습니다. ”
_그동안 ‘이기는 경기는 확실하게 잡고 지는 경기는 빨리 포기하는’스타일을 보여왔는데 SK에서도 유효합니까.
“그런 방식은 마운드의 안정이 전제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동안 맡았던 팀들의 경우 믿을만한 투수력이 있었기에 승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SK는 사정이 다릅니다. 투수로테이션을 하려면 최소한 4명정도는 갖춰져야 하는데 투수코치에게 물어보니 2명정도라고 합니다.
그나마 팀내 에이스격인 김원형은 부상중이고요. 내·외야수인 최태원 조원우도 부상으로 당분간 출장이 어려워 시즌개막이 눈앞인데도 아직 베스트 나인조차 갖추지 못 있습니다.
경기를 하면서 상황에 맞출 수 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_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생각입니까.
“팀이 달라진 만큼 모양새가 달라져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는 알고 있지만 현재는 그럴 정도가 못됩니다.
특히 팀마다 우리 팀을 승수쌓기의 제물로 삼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솔직이 말해 지금 뾰족한 타개책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감독은 자기스타일을 우선시하기 보다는 팀컬러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욕심으로는 현대 삼성 LG 등과 대등하게 견주고 싶지만 이 수준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단 내년에 유망신인, FA(자유계약)선수, 트레이드 등으로 선수층을 보강하면 우리의 팀컬러가 나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_이제 개인적인 질문을 좀 하겠습니다. 1년8개월동안 야인생활을 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특별한 일은 없었고 야구장 주변에 있었습니다. 주 4∼5회 경기를 봤고 스포츠지에 칼럼을 썼습니다. ”
_학자 집안이면서도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교(부산상고) 졸업후 대학 대신 실업팀(한일은행)으로 직행했습니다.
“당시 야구를 제대로 하는 선수들은 고교졸업후 곧바로 실업팀으로 가는 추세였습니다.
원래 대학진학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가대표가 되고 싶은 마음에 막판에 진로를 바꿨습니다.
대학에서 대표선수로 발탁되기란 불가능했거든요. 물론 부모님은 운동을 하는 자체만으로도 반대가 심했는데 더구나 대학까지 안갔으니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대학을 포기한데 대해 후회는 안하지만 아쉬움은 남습니다.
돌이켜보면 나의 야구인생은 운명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출발부터가 그랬으니까요. 중3(부산 대신고)때 늦게 야구를 시작했는데 동기는 야구를 하면 명문고에 입학할 수 있다고 해서 였습니다.
내심 고교에 입학하면 그만 둘 계산이었습니다. 고교 졸업후에는 ‘대표선수만 딱 한번 해보고 옷을 벗자’고 작정 선 계속 뛰었고, 마지막으로 군(해병대) 제대후 국가대표도 해보니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데다 대학에 다시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본인의 의사대로 흘러가집니까. 결국 지금까지 있습니다.”
_대부분의 감독들이 여건상 본의 아니게 가정에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감독께선 가장 가정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렇지도 못합니다. 다른 감독도 사정이 비슷하지만 그동안 집에서 떨어져 있는 기간이 많았습니다.
집사람이 속으로는 불만이 많겠지만 내색 않고 집안일을 책임져줘 결혼후에도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아이들(2남)과는 겨울에 스키를 같이 타는 정도였습니다.”
_많은 감독들이 경기나 대인관계 등 여러 스트레스 요인때문에 주량이 셉니다.
강감독께선 술을 잘 못하면서도 말많은 야구판에서 대인관계가 가장 원만한 감독으로 정평이 나있는데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합니까.
“술은 배우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지도자생활을 하려면 술도 마실 줄 알아야 한다고 하길래 동아대 감독시절 노력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경기전날 마신 술이 당일에도 깨지를 않아 경기를 엉망으로 치른 뒤 선수들 보기에 얼굴이 화끈거린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또 가정과 운동은 엄격히 분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절에 가거나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가곤했습니다. 지금은 좋지 않은 일은 빨리빨리 잊어버릴려고 노력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남재국
■강병철감독 프로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1965년 당시 실업최강이던 한일은행에 입단,
77년 동아대감독으로 부임하기전까지 국가대표 3루수로 이름을 날린 스타플레이어출신이다.
동아대감독시절 10차례나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어 지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83년 롯데 코치로 프로와 인연을 맺은 후 38세의 젊은 나이로 롯데의 지휘봉을 잡았다.
84년과 92년 롯데를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올려놔 프로에서도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절친한 선배인 김응룡감독(해태)의 보스기질과 역대 프로야구 감독들중 최고의 이론가 김영덕 전빙그레(한화 전신)감독의 세기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93년부터 98년 7월까지 한화감독을 역임했다.
1년8개월간의 야인생활을 끝내고 최근 신생팀 SK와이번스의 창단감독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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