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경영권 사태를 결정적으로 잠재운 것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99초 발언’이었다.정명예회장은 이날 오전 7시40분부터 1분39초동안 느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정몽헌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공식화했다. 자리는 현대 본관 15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현대경영자협의회 석상.
정명예회장은 별다른 운을 떼지 않고 곧바로 “여기 경영자협의회 의장은 정몽헌 단독으로 한다”고 발표, 2주째 혼미에 혼미를 거듭했던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정 명예회장 좌측에 앉은 정몽헌 회장, 우측의 정몽구 회장은 물론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등 30여명의 현대계열사 사장단들은 숨소리도 죽인 채 왕회장의 발표를 경청했다.
정명예회장이 퇴장한 직후 정몽구 회장은 발언을 자청, “앞으로 정몽헌 회장과 각 자가 협조해서 잘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이 때가 오전 7시55분. 현대를 휘감았던 검은 안개가 걷히는 순간이었다.
○…정명예회장은 평소보다 20~30분 가량 늦은 오전 7시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등과 함께 가회동 자택을 떠났다. 평소와 다름없이 현대 계동사옥 인근 문화센터 2층 이발소에 들른 정명예회장은 오전 7시27분 김사장, 이진호 고려산업개발회장 등의 부축을 받으며 사옥 현관에 모습을 나타냈다.
남청색 양복차림의 정명예회장은 불편한 걸음걸이였지만 항간의 추측과는 달리 건강한 모습이었다. “몽구, 몽헌 회장 중 누가 현대그룹을 대표하느냐” “형제간의 다툼을 알고 있느냐”고 기자들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지만 정 명예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15층 집무실로 향했다. 이에 앞서 정몽헌 회장은 오전 6시10분 출근해 12층 사무실로 향했고, 정몽구회장은 그보다 늦은 6시27분께 출근했다.
○…현대자동차는 이날 정순원 기획조정실장(부사장) 명의로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정실장은 성명에서 “이번 현대그룹 사태로 주주와 국민께 심려를 끼친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앞으로 소모적이고 대립적인 일체의 논쟁을 중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편 당초 이날 오전 10시로 예정됐던 정몽헌회장의 기자회견은 ‘단일회장 체제’가 공식 승인되면서 일주일 뒤로 연기됐다. 현대 PR사업본부측은 “오늘 경영자협의회에서 경영권 문제에 관한 공식발표가 있었는데 또 기자회견을 갖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 연기했다”고 밝혔다.
박정규기자
jkpark@hk.co.kr
윤순환기자
goodman@hk.co.kr
■정주영명예회장 육성녹음 전문
현대 PR사업본부는 27일 오전 개최된 경영자협의회에서 녹취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발언을 공개했다.
“발표(3월24일자 인사)한 것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또 국내적으로 다행이기 때문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경영자협의회 의장을 정몽헌 회장 단독으로 한다는 것을 여러분께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 등 여러가지 일이 바쁘기 때문에 정몽헌 회장이 단독으로 경영자협의회 의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제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일은 다 저와 의논할 것이니까 아무 걱정 안해도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희 회사 일을 정확하게 보도하기 위해 이렇게 아침 일찍 모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일문일답] 김재수 현대 구조조정위원장
김재수 현대 구조조정위원장은 27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갖고 두차례나 “정몽헌 회장이 현대경영자협의회 단독의장으로 공식 결정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 “국민 여러분과 현대를 아끼는 분들에게 사죄한다”는 말도 두 차례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회사 운영방식도 개선하고, e-비즈니스에도 적극 나설 것”이라며 “자세한 내용은 이번 사태가 완전히 마무리된 뒤 밝히겠다”고 설명했다.
_정 명예회장의 사인(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을 현대경영자협의회 공동의장으로 계속 유지한다는 인사서류 서명)에 대해 말해달라.
“모든 인사문제는 구조조정위원회에서 발표하도록 돼 있다. 내부 서류를 외부에 공개한 것은 유감스럽다.”
_사인한 적이 없다는 말인가.
“아는 바 없다.”
_정 명예회장의 건강은.
“걸을 때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에 이상이 없다. 어제 TV 뉴스도 봤다.”
_계열사간 지분문제는 어떻게 정리하나.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해서 차근차근 처리해 나갈 것이다.”
_자동차 소그룹의 계열분리는 앞당겨지나.
“앞당겨질 것 없다. 정부와 약속한대로, 당초 계획대로 추진될 것이다.”
_정몽헌 회장이 그룹을 직접 경영하는가.
“직접경영보다는 각사 사장들이 책임운영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_정 명예회장이 몽구·몽헌 회장을 질책했나.
“질책하지 않았다.”
윤순환기자
goodma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