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역시 ‘개혁의 무풍지대’였다. ‘국민의 정부’출범 이래 구조조정 드라이브는 쉴새없이 계속됐고 총수들이 대통령앞에서 개혁동참 서약서까지 썼지만 2년이 지난 오늘 재벌의 본성과 실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이 이번 현대그룹 인사파동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됐다.매각 합병등 중복자산정리와 부채비율 200% 감축으로 몸집은 줄었다. 상호채무보증철폐 및 사외이사 도입등으로 겉모양새도 바뀌었다.
그러나 총수(오너) 개인이 지분과 법적 절차를 무시한채 그룹 전체를 전횡하는 ‘황제경영’, 선단유지를 위해선 돈줄부터 장악하려는 ‘금융지배욕’, 공개된 상장기업을 2세에게 상속해야할 가업(家業)정도로 여기는 ‘족벌경영’등 재벌체제를 관통하는 핵심 메커니즘은 오히려 더 공고해진 것이다.
인사파동의 발단이 된 현대증권의 경우 현대측 지분은 우리사주조합을 포함해도 22.9%(2월말 현재)가 전부다. 더구나 ‘최종인사권자’로 당연시되는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은 단 1주의 지분도 직접 소유하지 않고 있다.
재정경제부 당국자는 “상법상 경영진 임명은 이사회 고유권한이지만 지분도 없고 등기임원등재도 되지않은 정 명예회장이 77.1%에 달하는 소액주주와 기관투자자들의 뜻을 무시한 채 현대증권 인사를 손바닥 뒤집듯 바꿈으로써 엄청난 혼란이 야기됐다”고 지적했다.
단지 그룹 오너라는, 법적 근거도 없는 통념상의 직함 하나만으로 불특정다수의 재산인 상장기업, 나아가 국민경제 전체를 뒤흔드는 전형적인 황제경영인 것이다.
현대측은 ‘모든 계열사 인사는 구조조정본부를 통해 발표한다’는 인사원칙을 천명, 구조조정본부가 과거 선단식 경영의 상징인 ‘기획조정실’의 간판만 바꿨음을 자인했다.
특히 이번 파동이 금융계열사(현대증권)를 차지하려는 몽구(夢九)·몽헌(夢憲)회장간 갈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재벌들의 금융기관 소유욕, 즉 사금고화 발상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적폐는 현대에서 불거졌을 뿐, 비단 현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재벌은 개혁되지 않았고, 정부의 재벌정책도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현대사태는 재벌개혁의 길이 얼마나 먼지, 해야 할 과제가 얼마나 많은지를 웅변적으로 입증시켜줬다.
고려대 장하성(張夏成·경영학)교수는 “제대로 된 기관투자자와 주주들이 나서 이같은 전횡에 제동을 걸어야 할 것”이라며 “정부는 외형상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재벌의 금융기관 소유를 원천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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