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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암스트롱, 미발표음반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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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암스트롱, 미발표음반 발매

입력
2000.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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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의 하나, 그가 백인 특권층이었더라 해도 그가 일궈낸 업적은 ‘예외적’이라는 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기적이다. 모든 권리가 깡그리 박탈된 흑인 계급이었으므로. 게다가 감옥소에서 탄생한 예술이라니.뉴 올리언즈 태생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나, 탄생 일은 아무도 모른다. 7월 4일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긴 하다. 그러나 이 설은 그의 탄생을 미국의 탄생일과 일치시켜 보려는 후대의 조작이다. 확실한 사실은 올해가 꼭 탄생 100주년이라는 점.

바람은 뉴욕시에 있는 그의 기념관 ‘암스트롱 하우스’에서 불어오고 있다. 전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암스트롱 바람의 진앙지. 생시의 그가 세계 팬들의 편지에 직접 답장을 써 주던 아담한 서재는 온통 유리로 호화장식된 욕실에 비한다면 아예 초라할 정도다.

또 별도 마련된 음악관에는 그가 생시 남긴 자료들이 소중하게 모셔져 있다. 생시 루이가 일일이 장식을 해 둔 650개의 릴테이프, 1,600개의 음반들(LP와 SP), 86권에 달하는 자신의 기사를 모아 둔 스크랩 북, 5,000장의 사진, 개인 서신, 본인이 쓰던 5개의 트럼펫과 14개의 트럼펫 마우스피스, 120개의 상장과 상패 등.

1970년께 뉴욕시로 이사온 뒤, 식솔들에게 “절대 잘난 체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암스트롱이었다. 환골탈태해 버린 자신의 집을 본다면 뭐라할 지…

때맞춰 그의 미발표 음반이 줄이어 발매되고 있다. 모두 모노 음반이지만, 잡음 감소 기술 등에 힘입어 감흥은 더 하다. 듀크 엘링튼 등 전설적 대가들을 사이드맨으로 쓴 ‘Falling In Love With Louis Armstrong’(BMG), ‘문 리버’‘헬로 달리’ 등 히트 넘버를 모은 ‘Louis Armstrong Sings’ 등 모두 5종.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음반평에서 별 5개.

연구 도서 출판은 일개 대중 음악가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의 위상을 확연히 드러내준다. 자필 서신의 최초 공개이기도 한 ‘루이 암스트롱의 사람들’, 극빈 흑인의 역경에 촛점을 맞춘 ‘루이 암스트롱: 문화적 유산’등은 대중문화 서술의 새 장을 여는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특유의 육성은 엔리코 카루소, 엘레노어 루스벨트 등 역사적 인물들의 육성을 파일로 전송해 주는 인터넷상의 사이트에 실려 있다.(www@sul.stanford.edu)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그의 변화는 뉴올리언즈라는 시골 음악이 세계의 유행 음악으로 커 가는 커다란 과정 그 자체이다. 킹 올리버 재즈밴드의 멤버로 있던 사이드맨 시절(1923-25년), 트롬본의 명인 키드 오리와 함께 한 캄보 Hot 5, Hot 7 시절(1925-28년) 등 그의 초창기에 쏟아지는 관심은 그 때문이다.

소련 시인 예프게니 예브투솅코가 바친 송시는 암스트롱의 영광을 잘 압축해 내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트럼펫 소리를 멈추지 말아요/지옥에 빠진 죄인들에게라도/한 줄기 햇살을//대천사 가브리엘이여/암스트롱에게 트럼펫을 내려 주시길’.

■몇가지 흥미로운 질문

새치모(Satchmo)란 별난 말은 어떻게 별명이 됐나? 두툼하고 큰 입 덕택에 어릴 적부터 ‘Gatemouth’‘Satchelmouth’ 등 별명이 많았다. 그러다 대중음악지 멜로디메이커의 편집장 퍼시 브룩스가 어느날 무심코 “Hello, Satchmo”라 불렀다. 너무나 마음에 든 암스트롱은 당장 자기 트럼펫에다 그 이름을 새겨 넣었던 것.

자식은 몇이나 두었나? 결혼은 4번 했으나 자식은 없었다.

악보를 볼 줄 알았나? 12살때 소년원서 독보법을 배웠다. 프로 밴드 입단 후, 그의 독보력은 일취월장했다. 악보를 못 봐, 감으로 재즈를 익혔다는 통설은 거짓.

이름은 ‘루이’인가 ‘루이스’인가? 64년작 ‘Hello, Dolly’에서도 보듯 그는 자신의 이름을 “루이스”로 불렀다. 그런데 1933년작 ‘Laughing Louie’에서는 ‘루이’로 불렀고, 그의 부인들 역시 “루이”로 불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팝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길 좋아했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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