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한 일행은 10월 2일 더저우를 떠났다. 더저우는 산둥성 북쪽 끝, 이제 산둥성이 다하고 수도의 직할지역인 쯔리성(直隸省, 지금의 허뻬이성)에 들어선다. 징저우(景州), 허젠부(河間府) 등을 거쳐 10월 8일 역수(易水)를 건너 신청현(新城縣)에 닿았다. 역수는 중국인의 파토스인 ‘강개(慷慨)’의 고장이다. 옛날 전국시대의 기원전 227년 의사(義士) 형가(荊軻)가 연나라의 부름을 받아 의리 때문에 진시황을 죽이러 갈 때 마지막 주연을 베푼 곳이 이곳 역수이다. ‘사기(史記)’ 자객열전의 이 대목은 그리스 고전비극을 압도하는 명장면이다. 홍익한은 역수를 보고 진한 역사의 감상에 흠뻑 젖어 버렸다.다음날 9일에 쭈어저우(탁州)에 닿았다. 이곳은 유비(劉備)의 고향으로 그 유명한 ‘삼국지’의 원점이다. 당나라 때인 879년에 세운 유비의 사당 ‘삼의궁(三義宮)’은 시내에서 남쪽으로 7.5㎞, 숭린띠옌(松林店) 러우상먀오촌(樓桑廟村)에 있다. 거의 모두 새로 만든 것이지만 공명, 관우, 장비를 비롯한 삼국지 스타의 생생한 소상(塑像)들이 신전에 도열해 제법 볼 만하다.러우상촌의 주민들 거의가 유(劉)씨 성이다.
러우상촌에서 서쪽으로 큰길을 건너면 쭝이띠옌(忠義店) 시까오촌(西皐村), 바로 장비의 고향이다. 근년에 재건된 장비 사당은 짓다 말고 방치돼 폐가처럼 을씨년스럽다.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해외에서 들여온 장비묘 건립기금을 시당국이 가로채 이 지경이 됐다고 한다. 유적은 장비 우물, 장비가 푸줏간을 할 때 고기를 달아맸다는 우물이다. 청나라 때 1700년에 세운 옛 비석이 그런 대로 창연하다. 이곳은 양봉의 고장인지 벌꿀을 파는 좌판들이 즐비하다. 정표로 장비의 후예로부터 ‘장비표’ 벌꿀 한 병을 샀다.
다음 해 1625년 2월 25일 홍익한은 귀국길에 올랐다. 다음날 26일 창신띠엔(長辛店)의 주막에서 회시(會試, 과거의 본고사)를 보고 귀향하는 스촨성(四川省) 청두부(成都府) 사람 채여혜(蔡如蕙) 일행을 만나 즐거운 담론의 시간을 가졌다. 홍익한은 전 해에 이괄의 반란으로 인조가 피난지인 충청도 공주에서 실시한 과거에 장원급제한 터라, 중국 과거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채여혜와 필담한 것이다. 중국 과거가 이 해 2월 9일 수도 베이징에서 치러졌고 발표는 2월 28일에 있었다. 이틀 뒤에 있을 발표를 보지도 않고 수천리 길을 돌아가는 채여혜에게, 홍익한이 왜 미리 돌아가느냐고 물었더니 채여혜의 말인즉 합격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험을 어지간히 잘못 본 것 같았다.
홍익한이 “중국 과거의 문체를 본 적이 없으니 답안을 보여달라”고 하자 채여혜는 “흘려 쓴 글발이라 차마 어르신네에게 보일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홍익한은 “선비의 생각이란 모두 같구려”하고 허허 웃고 말았다. 헤어질 때 채여혜는 “베이징, 스촨, 조선이 모두 하늘 아래 한 세상인데 어디 안팎이 있겠소. 선생의 단아한 풍채를 보니 머리가 스스로 숙여지오. 소생이 조만간 벼슬길이 열려 조정의 반열에 서게 된다면 다음날 다시 뵙기가 어렵지 않소”라 했다. 홍익한은 “온 세상 사람이 한 형제라지만 나그네길에서 이렇게 만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오. 그대의 말처럼 뒷날 베이징에서 만날 수 있다면 오늘 밤 만남은 전생의 인연이 아니겠소”라 하여 젊은이다운 싱그러운 서정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홍익한의 일기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내음이 물씬한 대목이다.
이국땅 나그네길, 낯선 주막에서 뜻하지 않게 지음(知音)을 만나 하룻밤 정을 주고받고, 다음날 해돋이에 다시 만날 기약 없이 총총히 헤어진 이국의 젊은이들. 홍익한은 하룻밤의 우정을 시폭에 담아 선물했다. 홍익한은 사행 길에 수십 수의 시를 썼으나 오늘날 남은 것은 겨우 세 편 뿐이다. 그 중 한편이 채여혜에게 준 석별의 시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풍류와 글은 예로부터 일컬었고/ 지금은 그 누가 이태백의 문장을 이어 받았소/ 여러분은 다음에 반드시 금방(金榜__과거 합격자 명단?)에 이름 걸고/ 머지않아 수레 타고 금의환향 하실꺼요 (從古艶稱司馬賦 /卽今誰是謫仙才 /諸公此去應題柱 /早晩高車得得回)’
사마상여는 전한(前漢) 때 사람, 이태백은 당나라 때 사람으로 다같은 스촨출신의 대시인이다. 홍익한은 낙방하고 쓸쓸히 귀향하는 선비 채여혜 일행을 따뜻한 덕담으로 위로한 것이다.
이로부터 5일 뒤인 3월 2일 시엔현(獻縣)에서 뿌청현(阜城縣)으로 가는 도중, 2월 28일 발표된 방목(榜目, 과거 합격자 명단)을 지방으로 급송하는 배달부를 만나 길에서 잠시 빌려 봤다. 장원은 자장(浙江)의 선비 여황(余煌)이다. 이날은 바람이 몹시 일고 황토비에 눈을 뜰 수 없는 궂은 날씨인데다 합격자 명단이 무려 300명이라, 상위권만 대충 훑어보고 총총히 길을 떠난 것 같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후일담이 생긴다. 채여혜의 신원이 궁금해서 스촨성의 지방지 ‘사천통지(四川通志)’를 찾아보니 ‘거인’(과거 본본고사 합격자) 대목에 ‘천계원년(天啓元年, 1621년) 거인, 청두부 즈현(資縣) 출신’으로 이름이 들어 있다. 홍익한의 기록대로 출신지와 신분이 확실한 것이다. 혹시나 해서 ‘진사’(進士, 과거 급제자) 대목을 찾아보니 뜻밖에도 천계 5년(1625년) 과거 급제자로 이름이 들어있지 않은가. 벼슬은 뒷날 중앙정부의 형부랑중(刑部郞中, 정5품 벼슬, 지금의 법무부 국장급)까지 올랐다. 깜짝 놀랄 일이다. 홍익한이 길에서 본 방목에서 채여혜의 이름을 찾았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그가 갈 길이 바빠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한스러운 일이다. 하기야 이틀 뒤의 발표도 보지 않고 돌아갈 만큼 자포자기한 사람이 어떻게 합격자 명단에 들 수 있을까. 그러나 홍익한의 시는 예언적으로 무섭게 적중한 셈이다. 채여혜 본인도 나중에 합격 사실을 알고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리고 홍익한의 시를 얼마나 고마워했을까. 채여혜의 소망대로 그는 베이징의 고급 관료가 됐지만 또 하나의 바람인 홍익한과의 극적인 재회는 끝내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빛나는 앞날을 약속 받은 이들 젊은이에게 뒷날 시대와 역사의 시련은 너무나 가혹했다. 조선이 청나라에 무릎을 꿇는 수모를 겪은 1637년, 홍익한은 머나먼 오랑캐의 땅 선양(瀋陽)으로 잡혀가 순국하고 말았다. 명나라의 장원인 여황의 삶도 고난의 길이었다. 명나라가 망한 후 청나라에 항거했으나 실패해 절망한 나머지 1651년 투신자살한 것이다. 한편 채여혜의 그 뒤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연행도
관동대 박태근 객원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정간씨가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사고에서 찾아낸 조선중기 기록화 ‘연행도폭」(燕行圖幅)’은 1624년 조선 인조의 왕권을 승인받기 위해 바다 건너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李德泂)·홍익한(洪翼漢) 일행의 행적을 담은 국내 유일의 바닷길 연행 화첩입니다. 낙장이나 파본 하나 없는 25장의 그림은 평북 곽산군의 선사포(宣沙浦) 항을 떠나 베이징(北京)에 이르는 사절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조선 중기 회화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
박태근 관공대 객원교수
명지대·LG연암문고 협찬
■[연행도기행] '연행도폭'의 23번째 그림 '쭈어저우부도'
‘연행도폭’의 23번째 그림은 ‘쭈어저우부도’이다. 그림 오른쪽이 쭈어저우성이고 성문은 북문이다. 행인은 북쪽으로 가고 있다. 난간을 장식한 큰 돌다리를 그림 한복판에 놓은 것은 조선 사절들이 중국 다리의 예술미와 역학성(力學性)을 좋아해 화첩에 자주 등장시킨 것이다.
다리는 쭈어저우성 북문 밖 쥐마허(拒馬河)에 놓인 영제교(永濟橋)이다. 당시 영제교는 명나라 황제 희종(憙宗)의 총신인 내시 위충현(魏忠賢)이 가교 공사를 했다. 1624년 3월 4일 귀국길의 이민성은 쭈어저우성을 지나면서 다리공사를 목격하고 “새 돌다리를 놓는 중인데 수천명의 인부가 동원되고 위충현이 감독한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 10일 이곳을 지난 홍익한은 “역사하는 소리가 사방에 진동하고 노새 50마리로 수레에 큰 돌을 실어 나른다”고 해 그때도 공사가 덜 끝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27일 귀국 길에는 준공된 새 다리를 건넜다. ‘만국조종(萬國朝宗)’이란 정문(旌門)은 영제교의 것이다. 그림의 다리가 엉거주춤 강가에 이어져 아직 온전히 놓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은 홍익한 일행이 베이징으로 가는 도중, 즉 1624년 10월 10일의 실경으로 보여진다.
이 밖에 쭈어저우의 명소를 알리는 정문이 3개, 비석이 하나 있다. ‘치우소전처(蚩尤所戰處)’는 전설의 황제(黃帝)가 지남차(指南車, 나침반)를 만들어 치우를 잡았다는 곳인데 쭈어저우성 서쪽에 유적이 있다. ‘팔성통구(八省通衢)’는 중국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왕도(王都)의 길목이란 뜻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역수하류(易水下流)’는 진시황을 죽이러 가는 의사 형가가 떠난 곳이다. ‘한소렬소생지지(漢昭烈所生之地)’란 비석은 유비가 태어난 곳이란 말이다. 이렇게 그림 속에 표지물을 그려 쭈어저우성의 역사적 특색을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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