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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박동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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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박동규 교수

입력
2000.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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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 있으면 아버지의 기일이 온다. 22년전 나는 원효로 4가 아버지집에서 언덕을 올라와 몇 집 떨어진 골목길에 살았다. 아버지는 우리 다섯 남매를 아버지집 둘레에 살게 해서 낮이나 밤이나 엉켜 살게 하는 것이 꿈이었다. 내가 갓 결혼했을 때는 돈이 없어서 마장동의 셋방에서 살다가 겨우 내 집을 마련한 것이 첫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리고 몇 년 뒤 원효로 아버지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아버지는 산책길에 우리집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가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아버지(박목월시인·78년 작고)가 오지 않았다. 여덟시가 다 되어갈 때였다. 전화가 와서 받으니 어머니(유익순·97년 작고)목소리였다. 다급하게 “빨리 와라”하고는 끊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지가 혈압이 좋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원효로 성당이 있는 산길로 산책을 다녀와서 안방으로 들어서다가 쓰러진 것이었다. 내가 뛰어가 쓰러진 아버지를 껴안았다.

조금 후 의사가 왔다. 희망이 없다고 했다. 가슴에 아버지를 껴안고 있는 나를 떼어놓고 어머니가 대신 머리를 껴안았다. 조금 있자 어머니는 조용히 “아버지가 이제 가신다”하고 나에게 일러주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갔다.

아버지와 작별하고 마당에 나와 혼자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을 때 처음 떠오른 추억은 내가 서울대학 교수가 되어 얼마되지 않은 삼십대 초반 아버지와 함께 포항해수욕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경주 할머니댁에 들렀다. 며칠을 머물고 서울로 돌아올 무렵 아버지는 포항해수욕장에 가보자고 했다. 아버지는 털실로 짠 두꺼운 해수욕복을 빌려 와 둘이 함께 입었다. 아버지는 시골 못에서 배운 수영실력을 바다 위에서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사진사를 불러 우리는 수영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사에게 주소를 적어주고 부쳐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서울로 오는 기차안에서였다. “네 엄마와 갓 결혼해서 포항해수욕장에 둘러본 적이 있었지”하였다.

아버지는 신혼시절 어머니와 갔던 그 자리를 큰 아들과 함께 간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마음의 깊은 우물에 밝은 추억의 보물을 넣고 언제나 두레박으로 길러올려 닦고 가는 자상하고 정이 많은 분이었다.

아버지와 찍은 단 한 장의 해수욕장 사진을 볼 때면 아무리 비지를 끓여먹어도 웃으며 우리의 머리를 만지던 생각이 난다. 꾸중을 듣고 밤에 이불을 쓰고 누워있으면 한밤중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가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특징은 우리 남매들의 말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가끔 터무니없는 책 값을 요구해도 한번도 “그렇게 비싸?”아니면 “그 책이 꼭 필요하니?”하고 물은 적이 없었다. “그래”하고 끝이었다. 자식의 모든 것을 믿어주던 아버지였다. 내가 서울대 교수가 되어 논문을 발표하면 아버지는 이 논문을 검토하여 붉은 연필로 문장이 미흡한 곳, 표현이 적절치 못한 곳, 그리고 논리가 허물어진 곳들을 온 종이가 빨갛게 되도록 줄을 쳐서 내 책상에 올려놓곤 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 둥근 식탁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자꾸 생각해 봐야 좋은 글이 되지”라는 말로 위로를 하여 주었다. 끝없는 스승이었고 멀리서 채찍을 들고 소리치는 조련사였다.

어머니는 밝고 합리적이었다. 아버지가 월급을 타서 몽땅 책을 사들고 들어오는 시인이었지만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남모를 고생을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전쟁이 난 50년 11월이었다. 헤어졌던 아버지가 겨우 집으로 돌아왔지만 생활을 꾸려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밖에 나가서 놀다가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배도 고팠다. 동생들에게 어머니가 어디 갔는지를 물어보아도 아무도 몰랐다. 이리저리 동네를 다니다가 앞마당에 나갔다. 마당 한구석에 숯가마를 넣어두는 광이 있었다. 그런데 광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어머니가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왜 울었느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곧 알게 되었다. 쌀이 없어서 저녁을 짓지 않았기에 그날은 굶고 자야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며칠후 내가 콩을 튀겨 함지박에 넣고 시장 모퉁이에 나가 팔고 있을 때도 어머니는 전봇대 뒤에서 몰래 나를 보고는 집에 들어서는 내 머리를 만지며 “잘 했다”하고 웃었다.

아버지가 돌아가고 이십년 가까이 우리 다섯 남매의 기둥이 되어 살아오는 동안 어려운 일만 있으면 아기처럼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지내왔다. 지금도 가끔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드는 버릇이 있다. 어머니를 찾는 마음이 살아있어서다.

아직도 내 생명의 핏줄 속에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살아있다. 이 사랑은 조그마한 상처도 부드럽게 달래주던 아버지의 인자하고 따뜻한 마음과 새벽이면 버스 세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에 있는 교회의 찬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던 어머니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地上에는 아홉켤레의 신발/ 아니 玄關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詩人의 家庭에는/ 알電燈이 켜질 무렵을/ 文數가 다른 아홉켤레의 신발을.(중략)

아랫목에 모인 아홉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박목월시인의 ‘가정’에서)

입력시간 2000/03/2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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