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황혼은 자주 화려했다. 그 기슭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커다란 폐허들도 황혼 무렵이면 막 잠에서 깨어난 생명체가 되어 얼얼했다. 표면석이 다 뜯겨진 피라미드를 온통 물들이는 새빨간 낙조 속에서 사람이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무능만이 내 것이었다. 여러 신전들의 잔해도 해가 기울어버린 오후에야 이제부터 나다 하고 제 모습을 으리으리하게 보여주었다.크고 장엄한 것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이곳 고대인만이 남겨 놓은 문명의 혁혁한 자취이다. 피천득(90)의 시가 생각났다. 아마도 젊은 시절 잠깐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을 때 쓴 것인지 모른다. ‘그들’이라는 시. ‘만리장성/피라미드/그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그리스의 영광/로마의 장엄/그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큰 문명이란 우선 거기에 동원된 민중의 무지막지한 고역과 희생을 먹고 이루어졌다는 것을 군더더기 다 제하고 그려냈다. 그런데 이집트의 고대는 민중의 피와 신음소리 이상이었다. 1999년 12월 31일 밤부터 2000년 1월1일 새벽까지 이집트 정부는 기자 파리미드 앞에서 대축제를 베풀었다. 프랑스인 예술감독을 불러다 펼친 ‘태양의 열두가지 꿈’에서 피라미드에 얽혀드는 레이저 광선과 밤하늘 현란한 불꽃놀이에 6만 관중이 마술에 걸려버렸다.
입장료도 턱없이 비쌌다. 지구상의 새해, 새세기, 새천년은 이집트의 고대로부터 시작한다는 야망이 거기 있었다. 이런 축제 이전에도 그곳에서는 종종 오페라 ‘아이다’의 야외공연이 있었으며 대통령 부인은 그런 공연을 거의 정기적으로 주관한다.
피라미드는 낮에는 잠들어 있다. 그러다가 밤에는 하늘 가득히 빛나는 별들의 시간에 몸 전체로 일어서는 것이다. 지난 날에는 이 기자 피라미드 언저리까지 나일강이 넘실거렸고, 그 일대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래서 피라미드의 물속 그림자가 더 볼만했던 것이다.
지금은 갈 데 없이 빈 사막에 잠겨있다. 18세기말 이집트 원정길의 나폴레옹은 바로 이곳 피라미드 전투에서 병사들을 독전했다. ‘병사들이여 4,000년의 역사가 피라미드 위에서 적군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라고. 그때의 포성과 함성, 그리고 온갖 비명 대신 2,000번의 새벽은 빛과 소리에 도취된 기성이 들렸다. 4,000년, 5,000년의 역사 대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천년을 앞두고 아이들처럼 서로 얼싸안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장차 무슨 괴물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나라는 것도 나의 복제에 지배받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득한 과거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으려는 본능으로 고대의 폐허를 찾아가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피라미드는 실컷 찬사를 받아왔다. 세계 7대 불가사의도 BC 2세기 그리스인들이 지정했는데 그중의 여섯은 사라지고 오직 피라미드만 남아있다. 나일강 서쪽 기슭에는 모두 38기가 남아있다. 고왕국(古王國) 제 4왕조의 작품들이다.
처음에는 계단식이다가 굴절식이었고 이어서 쿠프왕의 대피라미드 공법에 도달한다. 완공되기까지 20년, 강의 범람과 농한기인 여름에만 돌덩이들이 배에 실려왔다. 인부 10만명이 교대로 투입된 대역사였다. 이것을 완성한 쿠프왕이 이집트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다. 그의 욕망 전체가 바쳐진 하나의 피라미드야말로 그 이상의 어떤 것도 거부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신적인 것 혹은 신비에 사로잡힌다. 피라미드의 밤을 통해서 신들의 활동을 감지하는 영감에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는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외계인이 지구 위에 내려오기 위해 만들었다는 학설을 내놓기도 한다. 인류는 지구의 여러 지역에 그 힘을 문명에 반영했다. 그것의 첫번째가 피라미드였고 그것의 가장 큰 규모가 또한 이집트문명이다가 다른 지역으로 그 기운이 떠나갔다.
석양 무렵 낙타를 타고 기우뚱거리며 그곳에 다가가면 나는 고대의 힘에 휩싸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약 그곳에 피라미드가 없어도 낙조의 허공과 대지는 웅장했을 것이다. 그곳에 피라미드가 환영의 절대로서 서 있으므로 더욱 웅장했다. 삼각형 4면이 숨막히는 뿔로 솟아오른 이 기하학적인 절정 아래에서 인간들은 자신을 인류의 한 분자로서 돌아다볼 의무가 있다. 아마도 이 거대한 토목공사를 마친 뒤 왕은 곧 세상을 떠났으리라. 왕조의 힘도 물이 빠져 나간 것처럼 쇠진했으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이 문명의 영광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겠는가.
나는 기자 피라미드 셋의 주위를 돌고 돌았다. 그리고 그 부근에 오래 파묻혔다가 드러난 스핑크스 쪽으로 내려갔다. 시대는 처절하다. 이 대피라미드는 그것으로 끝나는 문명이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작은 피라미드 시대가 힘겹게 뒤를 잇다가 그것마저 없어졌다.
놀랍게도 피라미드의 조형(造形)은 현대적이다.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롭다는 역설은 이따금 맞아떨어진다. 피라미드는 피라미드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염없는 고대 천지창조설과도 관련된다. 우주는 혼돈과 함께 시작된다. 혼돈 속에서 태양이 생겨난다. 피라미드는 바로 태양광선을 표현하고 있다. 태양에서 달려오는 직사광선의 빛이 퍼져나가는 구도가 바로 피라미드이기도 하다. 실지로 많은 표면석이 뜯겨가기 전의 피라미드는 온통 빛을 받아 되비쳐주는 반사의 찬란한 발광체였다.
하늘과 땅을 빛으로 연결하는 이집트 사람들의 세계가 곧 피라미드였다. 또한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가는 피안의 계단이 피라미드였던 것이다. ‘태양으로부터 뻗어난 무한한 팔뚝,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으로 껴안는도다’라고 아톤신의 파라오 아케나텐은 말하고 있다. 또한 나는 ‘라신(神)이 깨신 곳에 가기 위해서 빛의 계단을 오르고 있도다… 하늘은 확고한 태양의 빛을 보내어 나를 이끌어 올리는도다… 하늘로 향하는 계단이 나를 하늘의 중심으로 인도하는도다’
왜 이렇듯이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하늘에 의존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사람이 이 지상에 오기 전 살았던 우주에의 향수 때문인지 모른다. 이집트의 이 피안의식이 그리스로 건너가 플라톤의 이상향 아틀란티스섬 전설에 직접 영향을 준다. 피라미드는 그 뒤의 신전과 지하분묘의 문명으로 바뀌어가며 여전히 지상의 힘과 내세에의 꿈을 가능케 했다. 아브심벨, 룩소르, 카르낙 그리고 아비도스의 아몬 신전들과 강 서쪽의 저승에 있는 방대한 지하분묘들은 오늘날 한낮의 고요 속에서도 그 권능이 유효하다. 몇천년 동안의 도굴로 텅 빈 분묘조차도 그 캄캄한 공간에는 고대의 힘을 소장하고 있다.
신왕조 람세스2세의 신전 짓기는 고왕조 피라미드에 버금가는 토목공사였다. 나일강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은 태양신전들의 위용은 대서사시의 소재였다. 이 세상에 와서 평균수명 30세인 나이를 백세까지 살았고 67년동안 왕권을 휘둘렀다. 정실을 비롯해서 공식 비(妃)만 100명이었다. 그녀들의 몸에서 왕자와 공주 200여명을 낳았다. 그것으로 모자라 딸 3명도 그가 사랑하는 후궁이 되어야 했다.
신전공사에는 백성 출신의 젊은이나 히브리 노예 그리고 전쟁포로가 투입되고 구약시대 모세도 이집트 상류층으로 그 공사를 지휘했다. 나는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 2층의 어룩어룩한 미이라실에서 람세스2세 미이라를 보았다. 신장 173㎝ 금발 몇가락으로 보아 그가 지중해인의 핏줄임을 짐작케 한다. 바늘로 꿰매지 않은 아마포로 둘둘 만 그의 시신은 3,000년 뒤의 오늘 잠을 깨어 기지개질을 할 것 같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가슴 위에는 작은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놓여 있다.
이집트 5,000년 세월은 BC 3,000년 고왕국 제1왕조를 창시한 메네스를 비롯해서 수많은 파라오들의 통치가 있어왔다. 혹은 산하 이집트를 통일한 절대왕조 혹은 지역할거의 왕조였다. 그 중에서 쿠프와 람세스 그리고 현대의 낫세르와 같은 위풍당당한 오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영웅인 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건축불가능의 건조물을 남겼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와 신전 그리고 아스완하이 댐이 이집트의 운명을 과시한다. 이곳의 문명은 중동의 여러 지역과 그리스 로마로 건너가서 서구 고대문화의 요소가 된다.
로마의 어디에서는 이집트 신이 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의 이집트에는 고왕조, 중왕조, 신왕조의 혈통은 모조리 끊겨지고 그 뒤의 여러 피가 파란만장으로 뒤섞여 있다.
/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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