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벤처, 미래를 보자](2)‘투자 대기자금 수십조, 한탕 노리는 벤처 수백개’
시중의 돈이 벤처로 몰리고 이틈에 한몫 보려는 사이비 벤처가 벤처업계 발전의 최대 장애물로 등장했다. 벤처의 옥석구분 작업이 시급한 시점인 것이다. 지난달 말 벤처기업 P사는 액면가의 10배로 실시한 인터넷 공모에서 단 20초만에 목표액 9억9,000만원을 훌쩍 넘어 부랴부랴 사이트 접속을 차단해야만 했다.
그러나 벤처업계에 돈이 넘쳐나는 요즘, 이 정도의 예는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될 성싶게 소문난 일부 벤처기업 사장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벤처캐피털과 투자자들의 청을 거절하느라 오히려 바쁘다.
벤처에 자금을 대주는 창업투자사가 올들어 2개월동안 13개 늘었다. 2월말기준 창투사는 모두 100개를 넘었다. 창투사 자본금과 창투조합, 재정융자금을 합친 벤처투자 재원만으로 3조403억원. 기회만 있으면 투자하겠다는 사채시장의 고액 전문투자자들과 월급쟁이, 주부들의 돈을 합하면 수조원에 이른다.
12조원에 달하는 증권시장 고객예탁금중 상당금액도 항상 벤처투자로 전환될 수 있다. 최근들어서는 재벌들도 앞다퉈 벤처 투자에 뛰어들고 있다.
이른바 재계의 공룡인 삼성과 현대 LG SK 등 4대 그룹이 벤처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금액은 1조여억원. 여기에 ‘손정의 펀드’등 외국자본까지 합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투자 가능한 벤처투자 대기자금은 최소 10조원에서 많게는 20조∼3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돈이 넘쳐나자 한탕을 노리는 사이비벤처도 많다. 사이비벤처의 공통적인 특징은 소액자본으로 회사를 설립한 뒤 수십배 증자를 거쳐 일정 시점에 처분하는 것.
결국 꿈에 부풀었던 투자자들이 ‘수건·폭탄 돌리기’의 마지막 술래로 망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제3시장 투자대상 발굴업무를 맡은 J투신 K팀장은 “일부 신생벤처들조차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고 있어 창업목적이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투자유치에 성공한 일부 기업들은 그 돈으로 기술개발을 하기는 커녕 재벌의 ‘문어발식’사업 확장을 흉내내는가 하면 부동산 투기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 박병엽(朴炳燁) 팬택 부회장은 “투자자금은 그야말로 사업에 투자해야 할 돈인데 그 자체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벤처인들이 늘고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블랙엔젤’의 폐해도 심각하다. 한 벤처기업인은 “일부 사채업자는 원하는 시기에 코스닥 등록을 하지 않거나 높은 수익률을 내지 못하면 폭력배를 동원, 이자를 붙여 주식을 되사가라고 압력을 넣기도 한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벤처투자가 사금융인 파이낸스꼴이 되지않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정도투자’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이비 벤처를 가려내고 될 성부른 벤처를 집중 육성하는 ‘옥석(玉石) 가리기’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백규(申百珪) 자유기업원 벤처경영실장은 “투자자들도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에 마냥 돈을 쏟아붓지는 않을 것”이라며 “특히 거품이 심한 인터넷 업체를 시작으로 올해안에 벤처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입력시간 2000/03/2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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