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수수 공장 인부의 아들에서 총통까지’대만 사상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한 천수이볜(陳水扁·49) 민진당 후보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눈물로 점철됐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술꾼 아버지와 초등학교 3년 중퇴의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집안 방벽에 새까맣게 적힌 빚 장부를 들여다보며 성장했다.
초등학교 이래 1등을 놓치지 않았고, 국립 대만대학 3학년 때는 최우수성적으로 법률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학비가 없어 “나중에 갚을테니 돈을 빌려달라”고 부모님을 설득, 고시에 합격한 뒤 빚을 갚았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대만정가에 감동적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고난의 야당생활은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대학 4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엄정국에서 정부의 정당결성 금지조치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야당의 대부’ 황신제(黃信介)가 군법재판에 회부되자 자진해 그의 변호를 맡은 것이 출발이었다.
1979년 언론자유수호운동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 1981년 타이베이(臺北)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순조로운 정치초년을 보냈다. 그러나 1985년 반체제 잡지 ‘펑라이다오(蓬萊島)’ 제작에 참여한 혐의로 8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부인 우수전(吳淑珍·49) 여사는 테러로 보이는 자동차 사고로 두다리를 잃는 등 20여년 야당생활 중 최대의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1989년, 1992년 연속 입법의원 선거에 당선, 재기에 성공한 뒤 1994년 12월 대만 정치 사상 처음 야당 후보로 타이베이 시장선거에서 승리, 대만 정치사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철옹성 국민당 정권의 균열조짐은 타이베이 시장선거에서 감지되기 시작했다는게 일반적이다.
시장 재직시 그의 시정(市政)은 ‘대쪽 행정’의 표본이었다. 1995년 고(故) 장제스(蔣介石) 총통 저택의 택지 일부가 시유지인 점을 들어 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중앙 및 지방정부에 기업세를 물리는 재정권 싸움을 통해 납세자들의 권리를 일깨웠다.
또 퇴폐이발소와 매춘 등 이른바 ‘8대 업소(八大行業)’를 일소하는데도 최일선에 섰다. 결국 이같은 원칙행정이 1998년 12월 타이베이 시장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한 큰 요인이 됐지만, 그의 청렴, 강직한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는 점에서는 더할나위없이 성공적인 4년이었다.
1995년 경남대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타이베이 시장 시절부터 한국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강조해온 대만의 대표적 지한파로 알려져 있다. 부인 吳씨와의 사이에 아들 쯔중(致中·19)과 딸 싱위(23)를 두었다.
타이베이=권혁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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