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강평]손동현인간사유능력 근거로 자연과 정신 잘 구분
강평에 앞서 ‘결정론과 자유 의지론’이라는 오늘의 주제를 다룸에 있어 유의해야 할 몇 가지 개념적 구분을 먼저 해 두고 싶다. 응모작들 가운데 개념적 혼선 때문에 주제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고 논변이 주변에서 맴돌다 그친 경우가 적잖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우선 결정론을 숙명론 또는 운명론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겠다. 결정론이란 모든 사건들이 어떤 법칙에 의해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보편적 인과율을 받아들이는 철학적, 과학적 입장이다. 이에 비해 운명론, 숙명론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 뜻대로 잘 되지 않고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인생관 또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사건들 사이의 인과 관계를 결정하는 법칙을 탐구하여 자연과 인간사를 관장하고 통제하려는 과학적 태도는 앞의 결정론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뒤의 숙명론에선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것과 연관되는 또 하나의 혼란은 자유를 결정과 대립시켜 비결정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어떻게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과연 자유일까. 사실 깊이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엔 결정되지 않은 사태란 없다. 모든 사태가 이미 그러한 사태로 있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렇게 결정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나 행동도 늘 어떻게 하고자 하는 자기 결정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도 그 자체로선 그렇게 결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비결정이란 자연에든 인간의 정신에든 있을 수 없는 사태다.
그 다음, 자유를 필연과 대립시키는 것도 자유 개념에 대한 혼란을 가져온다. 자유를 필연과 대립시켜 생각하면, 필연의 모순 개념인 우연을 자유와 동일시하려는 사고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 작용이나 행동이 우연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분석해 보면 자유로운 의지나 행동도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맥락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결정론과 자유 의지론의 논쟁이 안고 있는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모든 자연 현상은 자연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합리적 상식이다. 이 과학적 상식은 좀 더 분석해 보면 실은, 시간적으로 앞서 일어나는 사건과 뒤따라 일어나는 사건은 법칙적으로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한 번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에 뒤따라 일어날 사건은 그 법칙에 의거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 즉 자연은 어떤 원인으로부터는 어떤 결과가 법칙적으로 반드시 뒤따르게 되어 있는 인과적 결정 방식을 따르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행동의 자유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자연의 인과 법칙을 탐구하는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우리의 이 믿음과 자연의 인과적 결정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양립하는가. 핵심적인 것은 인간의 자유가 인과적 결정 방식은 아니라 하더라도 단순한 비결정은 아니며 다른 방식의 결정 방식을 따르고 있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자연의 일부인 신체는 역시 인과적 결정 방식을 따르지만, 의지와 행동을 주관하는 정신은 앞으로 올 미래의 것이 지금 있는 현재의 것을 결정하는, 이른바 목적적 결정을 따르고 있다.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할 때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목적이다. 그런데 정신은 이 목적을 스스로 설정하므로, 자유란 알고 보면 비결정이 아니라 자기 결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 정신의 두 영역을 구분할 때 우리는 이상과 같이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다. 문제는 이 두 영역의 관계이다. 몸과 마음의 관계로 압축되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철학적 가설이 아닌 과학적 이론을 갖고 있지 못하다.
금주의 응모작 가운데서는 안주영(포항여고), 박혜란(서울외고), 김지아(명덕외고), 김재경(명덕외고), 송 학(서령고)의 글들이 비슷한 수준으로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중에서도 정신의 영역을 사유 능력의 근거로 하여 자연과 구분하고 이를 토대로 결정론과 자유론의 양립을 논변하려고 한 안주영의 글을 최우수로 뽑고, 정신을 자연에 환원시킬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일관성 있게 논술한 김지아의 글을 우수1로 뽑는다. 논조는 비슷하나 글의 짜임새에 있어 다소 안주영만 못하다고 생각되는 박혜란의 글을 우수2로 뽑는다.
■[논술고사의 실제] 3월 25일자 주제 당선자
* 최우수
안주영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제1의 명제로 삼았다. 즉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았지만 그 순간 의심하고 있는 주체인 자기 자신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후손인 현대인들은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마저도 의심하고 있다. 인공 지능 컴퓨터와 인간 게놈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현대 과학 문명은 ‘인간의 행위’조차도 자연 법칙에 귀속시키려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 자유는 없는 것인가?
오늘날 과학은 혼돈 현상(카오스)마저도 일정한 법칙 속에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까지 그 적용 범위를 확장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 법칙과 인간의 자유가 갖는 본질적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인간은 육체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을 가지고 있는데, 두 영역은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 법칙이 세포 호흡이나 순환과 같은 육체적 영역에 적용되는 법칙임을 주지해야 한다. 이에 반해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는 정신적 영역의 것이다. 비록 두 영역이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 받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행위를 전적으로 자연 법칙에 귀속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기계론적 결정론만을 맹신한다면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문득 자신이 거대한 회로로 이루어진 기계임을 깨닫는다는 내용의 한 영화는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해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이것은 또, 개인적 차원에서 나아가 사회의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인간의 자유는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런데 기계론적 결정론에 따른다면 인간의 잘못된 행위를 규제할 근거를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과 인간의 자유를 균형있게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인간 역시 거대한 자연의 법칙 속에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정신적 영역에 속하는 인간의 자유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전자만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가 아닌, ‘인간은 죽었다’라고 선언해야 할 지도 모른다.
* 우수1
김지아
인류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어왔다. 그 중, 인류에게 커다란 충격과 영향을 미친 세가지 사건을 일러 뉴욕타임스의 한 편집자는 ‘인류가 겪은 세가지 통사(痛事)’라고 말한 바 있다. 첫째는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우주에 대한 지구 중심의 꿈이 깨진 것이고, 둘째는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을 뿐이라는 다윈의 주장이 신의 아들이라는 인간의 자존심을 뭉개버린 것이며, 셋째가 바로 인간은 스스로 자아를 통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 철저히 지배당하는 가엾은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로이드의 ‘무의식’ 발견이다.
서양의 전통적인 기독교적 인간 관계에서는 모든 생명의 가치에는 등급이 있어 그 가장 상위에 있는 인간은 다른 생물을 지배·이용할 수 있고, 신이 부여한 선 의지 즉,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제시문에서 보듯 과학의 발달에 의한 지식의 축적은 신화의 영역에 맡겨 두었던 여러가지 자연 현상의 비밀을 밝혀낸 것은 물론, 우주 멀리의 혜성의 주기를 예측하는가 하면 미세한 먼지의 움직임에까지 법칙을 찾아 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신이 창조한 영장이기에 앞서 자연을 구성하는 만물 중 하나임에 분명한 인간의 행위도 신이 부여한 자유가 아닌 과학의 논리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인문 과학의 기초가 되는 심리학은 바로 인간의 행동을 법칙화하려는 노력의 시작이라 하겠다. 프로이드 이래로 진일보한 심리학 이론들이 새로 나오지 않아 아직 자연 과학의 성과에 비해서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인간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고, 인간의 행위의 원인이 되는 갖가지 컴플렉스와 신드롬을 밝혀낸 것은 앞으로 심리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도 자연 안에서 법칙에 지배받는 하나의 객체로,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이 자유롭게 행위하는 존재라는 주장은 과학지식에 의해 인간 내면이 샅샅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유효할 것이다. 결국 인간이 끝까지 자유를 지닌 존재로 남기 위해서 주어지는 마지막 자유는 이를 밝혀내는 더 이상의 과학 지식을 거부하는 것 뿐이다.
* 우수2
박혜란
“나에게 우주의 초기 조건만 주어진다면, 나는 우주의 영겁을 설명할 수 있다.”기계론적 결정론을 주장한 라플라스가 한 말이다. 라플라스는 자연의 모든 현상은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과학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해감에 따라 이제까지 우연이라 믿었던 우주의 많은 현상들이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역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의 행위 역시 모두 결정되어 있는 것일까?
자연현상은 확실한 인과관계를 가진다. 그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과학적 지식이며, 결과는 원인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결정된다. 인간 이외의 자연에는 그 법칙을 부정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 f(0)=3 과 f (t)=t 이라는 공식으로 f(t)=t²+ 3 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고 이 공식은 그 물체의 t초 후의 위치와 상태를 확실히 정의한다. 모든 것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의 행위는 공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주위 환경과 상태를 정해 놓고 다음에 이어질 행위를 예측하라는 문제는 동물의 사례까지는 성립한다. 하지만 인간은 여타의 자연과 다르다. 외적 조건뿐만 아니고, 인간 자신의 사고 역시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개인이 모두 각자의 독창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결정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고는 인간으로 하여금 주어진 환경적 조건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자유 의지와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와 과학적 지식은 양립될 수 있다. 다른 사물을 인식하고 더 나은 발전을 이루는 데에는 법칙의 발견과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역시 인간 자신에 대한 법칙의 작용을 인식하고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몸부림, 인간의 다음 행동까지 지배하려고 했던 신이 준 초기 상태와는 관계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고력, 그것이 인간의 자유이다.
운명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운명이 있기 때문에 내 미래는 결정되어 있고 따라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내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한계이고, 말 그대로 운명일 수 밖에 없다. 우주 만물 중에서 유일하게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특권, 자유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때 과학적 법칙은 한계를 드러낼 것이고 미래는 그의 자유 의지대로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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