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시 한 구절이 있다. ‘나일의 낮이 우리의 하루이고 나일의 밤이 우리 모두의 잠이다’나일강은 그렇게 이집트의 모든 것이라고 말해도 된다. 강은 차라리 유구한 세월이었다. 그 흐름의 시간은 그러므로 먼 과거 먼 내일 사이에서 오늘을 애써 챙기는 일 따위는 없는지 모른다.
강의 수호신 하피는 아마도 다른 신들의 위력으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신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집트에서는 하늘에 태양이 있고 땅 위에 나일이 있다. 그것은 절대의 대칭이다. 그 불과 물의 강렬한 이념이 그 땅에서 온갖 생명의 원인인 것이다.
나일강의 역사는 범람으로 가능했다.
한번 강물이 아가리를 벌려 땅 위의 것들을 삼켜버리면 강 유역의 일체는 철저히 파괴와 유실로 망가져 버린다. 자라나는 곡식은 물론 세간살이도 양떼도 그 무엇도 깡그리 휩쓸어 간다. 미처 그 물난리를 피하지 못한 아기엄마와 아기 따위도 비명 한번 제대로 못지르고 물귀신이 되어 떠내려가고 만다. 누구의 밭이고 누구의 땅이고 그 구분이 남아있을 리 없다. 그런 땅의 경계 표시를 되살려내기 위해서 홍수 이전과 이후를 알아맞추는 측량과 기하학이 탄생한 것이다. 어린 시절 배웠던 기하학의 먼 조상은 이렇듯 이 나일강의 범람이라는 처절한 현장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이토록 파멸과 죽음으로서의 범람이 한편으로는 놀랍게도 부활로서의 범람이기도 하다. 저 상류의 여러 갈래가 청나일 백나일로 가다듬어져 그것이 다시 한 줄기 나일강 상류로 흘러오는 동안 무서운 힘으로 강 기슭을 다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범람은 위쪽의 영양분 많은 흙이 경작지대를 뒤덮어 주니 그야말로 문전옥답이 아닐 수 없다. 다음해 풍년은 틀림없다. 나일강 하류 델타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곳의 하나인 것도 이런 누대 범람의 공덕이다.
하지만 범람에 의한 피해는 언제나 컸다. 그래서 그것을 조절하는 시도도 몇번 있어야 했다. 낫세르의 시대를 지나서야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몇천년의 범람시대는 끝났다. 이번에는 아스완 일대의 기후와 생태계가 바뀌고 저 아래 지중해 연안 해수욕장의 사장 크기가 뚜렷이 달라졌다. 자연과 문명의 행위에는 언제나 심각한 불화가 태어난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위대한 얼굴은 언제나 자연에 대한 대립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연을 꿈꾸고 있다. 피라미드는 강 서쪽 사막 위에 이따금 솟아오른 황량한 벌거숭이 산의 모양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강은 그런 풍경들을 넌지시 바라보며 멈출 줄 모르고 흐른다. 흐르는 것처럼 거룩한 것이 세상에 있던가.
몇천년 전에도 떠 있던 삼각돛배 펠루카가 잔뜩 휘어진 삼각돛의 멋을 부리며 오늘도 바람부는 강물의 파도 위를 미끄러져 가는 풍경은 절경이다.
저 에티오피아와 수단 산악지대나 적도 부근의 빅토리아호 일대에 퍼붓는 집중호우의 물은 이 강 밖에는 달리 흘러갈 데가 없다. 그 물이 이집트 남부 오지에 이를 무렵은 5월말 6월초가 된다. 10월말까지 강 전체를 넘쳐나다가 12월초에야 빠져버리는 것이다.
옛날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는 나일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상나일의 이집트 남부, 하나일의 북부는 아주 옛날부터 두 개의 세계인 것이 하나로 되면서 그 통합왕조의 왕관도 두 개의 상징을 나타낸다. 북부 코브라의 붉은 관과 남부 독수리의 흰 관을 번갈아 써야 했고 또 북부는 파피루스, 남부는 연꽃으로 나타낸다. 하지만 그런 두 개의 이질을 나일의 흐름이 하나의 동질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강물은 언제나 그 땅을 흐르고 있는 커다란 실재이다.
이집트 땅 96%가 사막이다. 아마도 한 줄기 길고 긴 강이 없었다면 그곳은 오직 황량한 사막으로 내버려졌으리라. 사막의 천재 베드윈족일지라도 어디 한 군데 오아시스 없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막 한복판에서 인간은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갈 곳을 알고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는 하늘의 별자리를 간절하게 헤아리는 천문학이 발달한 것이다.
이슬람 태음력 1년 354일 내내 비 한 방울 구경하기 어려운 곳이 이집트 땅 대부분이다. 나일 델타지역이라 해도 한해 강우량 30㎜이니 어느 집엔들 우산 따위가 있을 까닭이 없다.
내가 카이로에 도착했을 때는 라마단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이번 우정에 겨운 여행에서 확인한 것은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부 아시아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뿐이 아니라는 것, 세계가 동남아와 극동의 유교 불교 그리고 서방세계의 기독교 뿐이 아니라 이슬람의 광막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집트는 실로 여러 종교의 흔적이 쌓여 있고 여러 인종이 섞여 있다. 지금은 이슬람이 소수의 원시 기독교 말고는 전부이다.
정부당국에서 빵값을 고정시켜서 거리의 노천가게에서 구워내는 넓적한 발라기 빵 20장이 300원 꼴이다. 그것도 해가 진 뒤에야 입에 넣을 수 있는 라마단 금식이 엄격했다. 3-5월은 사막의 뜨거운 바람철이다. 사하라는 고유명사로서의 사하라지만 아랍어로는 사막을 가리킨다. 모래바람 함신이 불어닥치면 사람들이며 짐승은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알라의 뜻이었다.
그런가 하면 소비아라는 모래폭풍은 몇 차례 세상을 휩쓸어간다. 마치 강의 범람처럼 그것은 땅 위의 폭력이다. 길게는 하루 종일 불어대는 바람이므로 약한 나무와 샘물은 그때 희생되어야 한다. 섭씨 45도의 폭염이 그 다음을 잇는다. 그 뜨거움은 그곳에서 태어난 뭇 생명을 무자비하게 단련시킨다. 다른 지역에서 낯선 손님으로 가는 사람은 그런 폭염이나 풍토병 등으로 중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집트에 간다고 했더니 하버드대 부속병원 의사는 놀라면서 몇가지 예방주사 처방을 내줄 정도였다.
나일강은 폭 20㎞의 녹색지대를 좋은 경작지대로 펼쳐놓은 곳이 몇군데 있다. 그 밖에는 폭 1㎞가 되는 곳도 적지 않다. 이런 강 유역이 세계에 그 유례가 없는 대문명의 발상지였고 6,000년의 역사와 삶을 이어온 것이다. 세상이 겨우 돌칼이나 돌송곳을 만들어 쓰던 시대에 이미 그런 문자를 만들어 문자생활을 한 곳이 나일강의 문화였다.
오시리스라는 신의 정치가 베풀어졌던 신정시대에 ‘지식의 신’ 토드 신이 상형문자를 만들었으니 그 문자 사용의 3,000년이 지난 뒤 파묻혔다가 18세기에야 세상에 해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옛 유적지 석판에는 신전과 피라미드를 건조하는 것보다 책이 더 영원하다고 새겨진 글이 있다. 그런 석판 새기기에 이어 검정과 빨강 잉크를 만들어 파피루스 종이에 글을 썼으니 정부의 서기나 ‘사자(死者)의 서(書)’, 교훈서를 쓴 신전 지도자와 연애시와 전쟁서사시를 쓴 시인들의 자취가 지금껏 남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나일강 기슭은 온통 신들의 고향이다. 신들은 제 고장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둘이 하나로 되기도 하고 각각 제 갈 길로 가기도 했다.
먼 후일 인간은 인간 혼자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태고의 원시시대 이래 신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근본의 불안 때문이다.
숱한 침입에 맞서고 숱한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와야 하는 것이 이집트 땅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아니 이 땅이야말로 언제나 주변세력과의 싸움으로 역사를 이루어 왔다. 이런 전쟁을 비롯해서 질병이나 빈곤 인간의 온갖 번뇌와 고통에 신이 필요했다. 또한 왕은 그 왕권이 끝없이 계속되기를 바랐고 왕 자신의 생명 연장이 절실했다. 그래서 자신은 신과 함께 있다가 죽은 뒤에는 불멸의 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믿었다. 오시리스 신도 저승을 주재하는 영생의 신이자 이 세상의 왕이었다.
강 동쪽은 이 세상이었으나 해가 지는 강 건너 서쪽은 저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뒤의 시신은 강 건너 저 세상으로 실려가 묻히는 것이다.이집트의 모든 피라미드는 강 서쪽에 있다. 또한 역대 파라오들의 무덤도 서쪽의 ‘왕들의 골짜기’에 있다. 옛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해지는 곳을 저승으로 삼았다. 이집트 뿐이 아니라, 유대 땅도 인도도 중동도 공통된 그 피안의식으로 서쪽에 그 자신의 내세를 두었던 것이다.
나는 이집트 가요 ‘하비비 야노렐 파인(단식 때문에 나는 눈이 멀었소)’라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나일강의 밤배를 타 보았다.
*매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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