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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 21] (17) 가족의 유연화-동시적 가족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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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 21] (17) 가족의 유연화-동시적 가족의 가능성

입력
2000.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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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 21] 17. 가족의 유연화-동시적 가족의 가능성특정한 남녀의 지속적 결합과 그들 자녀의 양육을 알맹이로 삼는 가족의 기본 형태는 인류의 역사 시대를 관통해서 보편적으로-또는 적어도 주류 형태로-존재해 왔다.

물론 어미와 자식 사이 이외에는 부부로서의 성적 결합이 동시적으로 허용됐던 ‘혈연 가족’이나 그 금기가 오누이까지만 확대된 ‘푸날루아 가족’을 비롯해서 선사시대의 인류가 영위했으리라고 상상되는 여러 형태의 군혼가족이 이론적으로 가능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역사 시대 이래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부부와 자녀를 핵으로 하는 다소 배타적인 최소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다란 역사의 관성에 실려 있는 가족이라는 1차집단 자체가 사라지는 날은 쉬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최근 역사가 가족의 주류 형태를 확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동시켜왔듯, 앞으로의 가족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가족 형태와 똑같지 않으리라는 것도 어림할 수 있다.

더구나 사회 변동의 속도는 모든 부문에서 점점 빨라지는 추세이므로, 21세기의 가족 제도가 변화의 무풍지대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관측자에 따라서는 가족 제도의 변화가 대단히 급격하리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1998)에서 ‘가족’을 “인구에서 예술, 성(性)에서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날 커다란 변화에 따라 그 뿌리부터 뒤흔들리게 될 제도”라고 과감히 진단한다.

아탈리가 보기에 가족을 뒤흔드는 것은 21세기를 풍미할 개인주의와 시장 원리다. 개인주의와 시장 원리는 단순히 선택의 폭을 넓힐 뿐만 아니라, 일단 내린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한다.

그것은 특히 결혼의 선택에서 그렇다. 개인주의가 시장원리에 실려서 최고의 가치가 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감정의 소비자가 될 것이고, 그에 따라 결혼은 점점 불안정하게 될 것이다. 어떤 남녀가 결혼을 하더라도 그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서약이 영원한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이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엷어지거나 사라질 것이므로, 이혼도 두려움의 대상이나 죄책감의 이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혼은 실패한 인생의 표지가 아니라 자유를 위한 선택의 상징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낭만적 사랑’이라는 신화가 완전히 붕괴된다는 것을 뜻한다. 낭만적 사랑이란 한 사람의 짝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운명적으로 결정돼 있었고, 그들의 사랑은 그래서 유일하고 항구적이며, 당연히 한 남자나 여자는 한 여자나 남자에게만 영원히 충실해야 한다는 애정관(愛情觀)이 낳은 관념적 사랑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만이 아니라 그 이전 중세 유럽의 로맨스 문학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은 이런 낭만적 사랑의 담지자들이었다. 낭만적 사랑은 중세와 근대 유럽의 일부일처 가족제도를 떠받치고 있던 신화이고, 가톨릭 교회가 지지해 왔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지금도 가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짝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사도 문학이 숭고한 여성상을 그리며 낭만적 사랑을 선전하던 중세때조차도 그것은 현실에서 구현되기 어려운 안개 속의 뿌연 사랑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현대의 현실주의자들은 이 이데올로기를 거의 신봉하지 않는다.

오늘날 결혼한 세 쌍 가운데 한 쌍은 이혼으로 그들의 관계를 끝내고 있고, 앞으로 이 비율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것은 ‘결손 가정’의 수가 늘어나리라는 것을 뜻한다. 사실 결손 가정이 아니더라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유대는 점점 엷어지고 있다. 이제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나 게임기 앞에서 보낸다.

동거하는 가족이 반드시 법적 가족이여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난 2월 6일 핀란드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1세기를 흐뭇하게 맞은 타르야 할로넨(57)은 법적으로는 독신이지만 펜티 아라얘르비라는 남자와 동거하고 있고, 안나라는 딸을 두고 있다.

이혼과 재혼이 흔하게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 동안 그의 가족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사는 동안 여러 가족에 차례로 소속될 것이고, 아이들도 차례로 여러 부모를 갖게 될 것이다. 가족이 유연화하는 것이다. 그 때 가족이라는 것은 자신이 소속돼 온 여러 가정들 가운데 하나를 일컫는 말이 될 것이다.

아탈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유연화’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사람들이 한 가정에 이어서 다른 가정을 갖는 데 만족하지 않고, 동시에 여러 가정을 원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내다본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다. 지금의 법률용어로 말하자면 중혼(重婚)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곧 합법화하지는 않겠지만, 관습의 수준에서는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인정될 것이라는 게 아탈리의 예측이다.

그때 남녀 관계에서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은 감정의 솔직함이다. 감정의 솔직함이 최고의 가치가 될 때 어떤 상대방에 대한 배타적 충실이 배우자의 의무라는 생각은 사라진다.

사람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동시에 여러 가족을 인정하게 되고, 남자든 여자든 동시에 여러 배우자를 지닐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사랑은 에리히 프롬이 정식화한 ‘소유에서 존재로의 이행’을 경험할 것이다.

이런 ‘동시적 가족’이 과연 21세기에 가족 형태의 주류로 자리잡을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주류화한다고 하더라도 그 가족은 부모_자식보다는 부부(들)를 중심에 둔 가족 형태일 것이므로, 아이들의 양육을 커다란 사회 문제로 만들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버지가 맡았던 역할의 큰 부분을 국가나 시민사회가 떠맡아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버트런드 러셀이 ‘결혼과 도덕’(1929)에서 지적했듯, 시민혁명 이후 민족국가는 의무교육 제도를 통해서 전통적인 아버지의 자리를 조금씩 빼앗아왔다. 러셀은 그런 ‘임무 교대’가 아동 학대를 감소시키고 사회의 보건 수준을 높였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세계 정부의 등장 이전에는 국가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치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국가가 아이들에게 고취하기 마련인 이른바 ‘애국심’이 러셀의 눈에는 현대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위험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것은 국제적인 시민사회가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에 개입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기술적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전통적 가족의 해체를 뜻하는 이런 ‘동시적 가족’의 등장이 반드시 두려워할 것만은 아니다. 지금 존속하는 가족의 내면구조, 특히 그 권력구조는 가부장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

부부 가족을 원칙으로 하는 유럽이나 미국의 가족에서도 남자가 우선시되는 일이 흔하고, 한국의 확산적 직계 가족은 가장의 권위를 정점으로 해서 강한 수직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동시적 가족’의 등장은 여성 해방에 기여하게 될 것이고, 우원(迂遠)하게는 동성애자들의 해방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주의’에 대하여

우리의 국어사전에는 ‘가족주의’라는 말이 올라있지 않다. 그러나 그 말은 ‘연고주의’나 ‘정실주의’라는 의미로 일상적으로도 더러 쓰인다. 북한에서는 ‘가족주의’라는 말이 매우 부정적 함의를 담아 흔히 사용된다.

북한에서 나온 ‘현대조선말 사전’은 ‘가족주의’를 “몇몇 사람들끼리 당적 원칙을 떠나서 옳지 못한 관계를 맺고 서로 싸고돌면서 당과 혁명, 조직과 집단의 이익보다 자기들의 이익을 앞에 내세우는 비조직적이며 비원칙적인 사상 경향이나 행동. 가족주의는 보통 친척, 친우관계, 동향, 동창, 사제 관계와 같은 것에 기초하여 생기는 부르주아적 및 소부르주아적 사상의 표현이다. 가족주의는 지방주의와 함께 종파를 낳는 온상이다”라고 풀이한다.

남한에서도 전문적 담론의 장에서는 가족주의라는 말이 사용된다. 가족주의는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가족 성원보다 더 중시하고, 가족의 인간 관계를 가족 이외의 사회관계에까지 의제적(擬制的)으로 확대해 적용하려는 세계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가족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고, 부부 관계보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더 중요시되며, 개인보다 집안을 우선하는 집단주의의 지향이 일반화한다.

가족 안에서의 부모와 자식 사이의 수직적 관계는 본가와 분가 사이로 확대되고, 기업에서의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로 확대되고, 국가나 정치의 영역에서 권력자와 국민의 관계로 확대된다.

개인은 그 가족 곧 집단 속에 매몰되어 그 개인성을 잃고 어떤 집단의 표상만을 지니게 된다. 구체적인 가족의 수준에서 그것은 지나친 교육열과 자기 자녀에 대한 극단적 보호 그리고 가족 이기주의로 치닫는다.

한국의 전통 가족이 지닌 혈연적 수직 구조라는 본질은 근대화 이후에도 변화하지 않고 있다. 다만 농촌공동체에서의 상속물이었던 토지라는 생산수단이 교육이라는 생활수단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국의 중산층 가정에 일반화한 , 거의 광적인 교육열은 바로 이런 가족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폐쇄적 집단으로서의 가족에 대해서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가족이라는 것, 나는 너를 증오해!”(‘지상의 양식’)라고 일갈한 바 있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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