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욱기자의 막전막후] 극단 신화 '치명적 선택'“여기, 여기, 여기에다 칼자국을 내주지. 다른 새끼들이 침흘리는 일이 없게 말야.” 결혼을 앞둔 여자 미술가 혼자서 작업중이던 국도변 외딴 조각 작업실에 남자가 침입, 맨살에다 시퍼런 조각도를 바싹 들이댄다. 극단 신화의 ‘치명적 선택’은 숨막히는 강간 현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엎치락 뒤치락거리는 둘. 남자가 갑자기 귀가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른다. 무기 될 만한 것을 찾아 맹렬히 더듬던 여자가 살충제 깡통을 잡자마자 남자 눈에다 뿌렸던 것. 상황은 이제 반전한다.
배우들의 뜨거운 연기가 자아내는 열기가 자욱하다. 성폭행의 위기 앞에 놓인 민경 역에 박인서(33), 증오와 욕망의 화신인 영태 역의 한범희(35), 민경의 집에 놀러 왔다 우연히 끔직한 상황을 접하게 된 친구 역의 권나연(31) 등 4명의 배우들은 모처럼 보는 급박한 심리전의 리얼리즘 무대를 만든다.
강간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증거와 증인 부재로 경찰에서 풀려 난 강간범에게 30년간 내쫓겨 다닌 미국 여인의 실화에서 근거한 연극이다. “나한테는 징역, 저 남자한테는 무죄방면. 정상참작이 돼 집행유예로 풀려나면 난 어떻게 해야하지? 김교수와 파혼하고 알량한 시간 강사 자리도 그만 둬야겠지.” 공포에 떠는 친구들한테 민경이 울부짖으며 법률상의 맹점을 지적한다. 겁탈당할 뻔했다가 폭력을 써 남자를 물리친 그녀의 고민은 바로 여기 있다.
숨막힐 듯한 무대지만, 여타 연극에서 보기 힘든 배경 음악이 생동감을 더 해준다. 목욕 직후 기분 좋게 나오는 민경이 틀어 두는 빌 에번스의 쿨 재즈, 영태가 민경을 짓누를 때 나오는 오네트 콜먼의 광란하는 프리 재즈 등 재치 있는 선곡이다.
연출자 김영수씨는 “신고에서 조사·판결까지 수치심을 일으키는 성폭행을, 피해자의 내면에서 생각해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1978년 미국 작가 마스트로시모네가 실제 사건을 극화한 작품. 증거와 증인 부재로 풀려난 강간범에 쫓겨 이름을 바꾸는 등 30년 동안 불안속에 살았던 55세 여인의 실화다.
젊은 관객들의 호응과 함께 문예회관소극장에서 초연을 끝낸 이 연극은 16~4월 30일까지 인간소극장에서 연장 공연된다.
입력시간 2000/03/14 18:59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