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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과오인정' 문건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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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과오인정' 문건발표

입력
2000.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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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과오인정' 특별미사 집전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2일 유대인 박해, 이교도 강제 개종 등 지난 2000년동안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미사를 집전했다.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가 이처럼 포괄적으로 교회의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한 것은 가톨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가톨릭이 교회 역사상 3번째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용서의 날’로 정한 이날 미사에는 로마 교황청을 대표하는 5명의 추기경과 2명의 주교, 1만여명의 성직자와 신도들이 참석했다.

사순절을 맞아 보라색 제의를 입고 성베드로 대성당내 바실리카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교황은 과거 역사상 한때 기독교인들이 무자비한 수단과 행동으로 교회의 명성을 더럽혔다는 점을 인정했다.

교황은 이날 설교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교인들의 회개를 받아들여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신에게 기도했으며 추기경과 주교들은 가톨릭 교회의 과오를 7가지 범주로 묶어 용서를 구했다.

교황의 설교에서는 특정 집단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이은 추기경과 주교들의 기도는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다.

추기경들이 밝힌 7가지 범주의 죄는 일반적인 죄 진리에 대한 봉사를 이유로 한 죄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죄 유대인에 대한 죄 사랑· 평화· 문화 존중에 대한 죄 여성과 소수민족의 존엄성에 대한 죄 인권에 대한 죄 등이다.

조아킨 나마로-발스 바티칸 대변인은 지난 주 “교황은 괴롭힘을 당한 개개 집단이 아니라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교황청은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교회가 인류에게 범한 각종 과오를 정리한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범죄’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이 문건은 교회의 잘못으로 십자군원정, 종교재판, 유대인 박해 등을 들고 있다.

■ 전세계 환영속 유대인들 일부 '불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2일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죄에 대해 신의 용서를 구한데 대해 세계의 가톨릭 교도들은 대체로 환영했으나 유태인, 동성연애자등은 자신들에 대한 언급이 구체적이지 못해 아쉬워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라우 수석 랍비(유태교 율법학자)는 교황의 사죄를 환영하면서도 교황이 홀로코스트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데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했다. 라우 수석 라비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자세는 그의 선임자들의 노선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라우는 그러나 “교황의 설교에서 홀로코스트가 주제로 언급되지 않는데 대해 크게 실망했으며 특히 요한 바오로 2세가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서 홀로코스트를 직접 목격했기에 실망감이 더욱 크다”고 말했다.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교황의 사려깊은 용서의 기도를 환영한다는 반영을 보였다. 보스턴의 버나드 로 추기경은 미국의 노예제도와 신부들에 의해 자행되는 최근의 성적 학대에 대한 사죄를 했다. 보스턴의 가톨릭 신자 마이클 브래디는 “속죄가 치료과정의 시작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미국 유태인위원회의 랍비 제임스 두딘씨는 “이번 미사는 가톨릭-유태교 관계에 대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라고 평가했다.

■ 십자군 원정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실지(失地)를 회복하라는 칙령을 내리면서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인류를 피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성지회복’이라는 숭고한 목적의 이면에는 너무나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베네치아 상인은 무역로를 열어 축재(蓄財)하려 했고, 가난한 병사들은 한몫잡는 기회로, 교황은 자신의 영향력 극대화를 노렸다. 1,095~1,101년, 1,145~47년 등 총 8차레에 걸쳐 단행된 십자군은 분노에 찬 군사행위였다. 첫 원정에 나선 1,500명의 십자군은 4년간 부녀자를 포함해 무려 7만여명의 예루살렘인을 학살했다. 2세기간 계속된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은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이기주의를 낳았다.

십자군에 참가한 서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이 뒤따랐다. 특히 십자군 구성은 동·서 교회의 영구적인 분열을 낳았다. 하지만 유럽인들의 아픔이 이슬람 보다 클 수는 없었다. 유럽은 이슬람과의 접촉에서 여러가지 면에서 이득을 봤다.

종래 기대와는 달리 1,099년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한 십자군은 이곳에 여러 기독교 국가를 세워 증오의 씨앗을 심었다. 영국의 교회 사학자 폴 존슨은 “이 사건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 종교재판

가톨릭의 종교재판은 700년동안 계속된 이단자에 대한 박해의 과정으로, 수십만명이 고문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심문한다’에서 비롯된 종교재판이란 말은 1231년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 시작됐다. 당시 그는 프랑스 주교들에게 마법, 연금술, 악마숭배와 같은 이단을 억압하겠다는 뜻을 알렸다.

처음 심문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카 수도회에 의해 독점적으로 행해졌다. 전국을 돌며 혐의자를 찾아나선 이들은 혐의자를 종교재판소로 소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중세 종교재판은 대부분 남부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행해졌다. 1252년 교황 이노센트 4세의 교서에 의해 고해를 끌어내는 수단으로 인정받았다. 1478년 식스투스 4세는 스페인의 종교재판을 인정했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티야의 이자벨라의 통치때에 절정을 이뤘다. 이들 군대는 15, 16세기 이베리아 반도를 휩쓸었으며, 유대인과 회교도를 기독교로 강제로 개종시켰다.

종교재판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사람은 스페인 종교재판소 초대 장관을 지낸 토마스 드 토르크마다(1420~98)인데, 그는 대심판관의 이름하에 약 2,000명의 이단자를 화형시켰다.

1808년 공식적으로 종료될 때까지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30만명 이상을 화형시켰다. 여기에는 우상의 형태로 화형시킨 1만8,000명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1908년 바티칸은 규율과 파문을 다룰 곳으로 이단자 심문소(검사성성·檢邪聖省)를 만들었다. 종교재판의 희생자로는 현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저 베이컨(1220~1292), 천문학자 갈릴레오 등이 있다.

■ 유대인 박해

교황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에 대해 기독교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의 위험을 무름쓰고 유대인들에게 도움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다른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답게 영적으로 저항하거나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또 수세기간에 걸쳐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에 대해 적대감을 표시한 것이 슬픈 역사적 사실이다.

교회는 수십년 전까지 공공연히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다.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초기 기독교도는 유대인을 원수로 여겼다. 4세기 교부 크리소 스토머스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돼지같은 백정’으로 부르며 영원한 저주를 내렸다.

교회의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된 것은 11세기 십자군 원정 때부터였다. 이후 유대인은 전염병을 옮기고 영아유괴나 일삼는 천민으로 취급받았다.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조차 “사악하고 독살스러운 뱀”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예수는 유대인 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교회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제대로 반대하지 못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지난해 기독교 역사학자 존 콘웰은 ‘히틀러의 교황: 숨겨진 역사’라는 책을 통해 당시 교황 비오 7세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강력히 규탄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는데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가톨릭 과오' 어떤 사건들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용서를 구한 가톨릭의 과오는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것이다.

▲종교재판

중세 말기 이후로 로마 교황의 공인 아래 이단자를 마녀로 몰아 태워죽인 이른바 ‘마녀사냥’이다. 1484년 교황이 ‘긴급요청’ 회칙을 발표해 마녀가 있다며 심문관의 활동을 옹호한 데 이어 1486년 ‘마녀의 쇠망치’라는 마녀사냥 지침서가 나오면서 마녀사냥이 본격화했다. 독일의 도미니크수도회 성직자 2명이 쓴 이 책은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은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며 마녀를 찾아내 처단할 것을 촉구했다. 마녀는 초자연적 능력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고 악마의 정부라고 믿어졌다. 마녀로 몰리면 끔찍한 고문 끝에 산 채로 화형됐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처형된 숫자가 1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마녀사냥은 유럽에서 1590~1610년, 1625~35년, 1660~80년 사이에 특히 심했다. 마녀사냥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보급으로 사라졌다.

▲십자군전쟁

11세기 말부터 15세기 중엽까지 서유럽 그리스도교 연합군이 성도 예루살렘탈환을 내걸고 일으킨 전쟁이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교 성지이기도한데 당시 이슬람 치하에 있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교도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되찾자며 십자군운동을 선언하면서 십자군 운동에 불이 붙었다. 오스만 터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제국이 성지 순례자들이 이슬람교도에게 박해받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한 게 계기가 됐다.

십자군은 8회 이상 츨정했는데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를 수없이 죽여 피가 발목까지 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십자군전쟁은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동지중해 패권 다툼, 영토 싸움으로 변질된 채 지속되다가 1153년 비잔틴제국의 멸망으로 공식 소멸됐다. 이 전쟁은 유럽의 ‘대항해시대’ 출발점이자 중세 봉건주의 몰락의 기폭제가 됐다.

▲홀로코스트(Holocaust)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가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나치는 대중적 불만의 배출구를 반유대주의에서 찾았다.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론, 나치의 게르만 민족 우월론이 동원됐고 러시아혁명에 대한 반발로 반공주의가 대두하면서 유대인 탄압을 정당화했다. 나치는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등 강제수용소로 끌고가 가스실에서 죽였다. 히틀러는 2차대전을 일으키면서 제일 먼저 로마 교황청과 화해협약을 맺었고 가톨릭교회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입력시간 2000/03/1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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