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핸드폰''개그맨'이 사전에 없다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핸드폰''개그맨'이 사전에 없다고?

입력
2000.03.14 00:00
0 0

안정효 지음, '가짜 영어사전'KBS 2TV 12일 오후 1시 5분 ‘서세원쇼’. 방송이 시작된 뒤 얼마 안 돼 진행자 서세원과 출연자들이 나누는 대화. “토크박스 시간입니다.” “누구 라인이지?’ “크락션을 눌러봐!” 국적 불명의 영어가 막 쏟아져 나온다. ‘리셀 웨폰’을 ‘치명무기(致命武器)’로, ‘AIDS’ 를 ‘애사병(愛死病)’으로 자기말화 한 대만과는 사뭇 다른 TV의 풍경이다.

만약 출연진이 안정효의 ‘가짜 영어 사전’을 읽었다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얀 전쟁’ ‘은마는 오지 않는다’ 등으로 알려진 소설가이자 번역문학가인 안정효(59)씨는 순수 국내 영어파다. 그래서 그는 국내에서의 영어의 잘못 쓰임을 누구보다 더 실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책에서 방송이나 신문,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영어가 사용되는 용례 990여개를 다양한 예문과 함께 날카로운 문체로 지적하고 있다.

국제 경기에 나간 선수들이 스스럼없이 ‘화이팅’을 외치고 작가는 대본에 ‘멘트’를 잘 하라고 써놓는다. 외국인들은 ‘화이팅’을 ‘한 판 붙어보자’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거두절미한 ‘멘트’라는 말은 뜻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개그 맨’은 ‘입에 재갈을 문 사람’ 정도밖에 해석이 안된다. 물론 개그(gag)가 ‘한줄 짜리 익살’이란 뜻이 있지만 ‘개그맨(gagman)’이란 영어 단어는 없다. 한국에는 왜 이리 ‘밥 먹는 밭’이 많은가. 가든(garden)은 참으로 시적(詩的)인 한국적 단어라고 꼬집는다. 핸드폰은 영어사전에 없다. 셀룰러 폰(cellular phone)이나 셀 폰(cell phone)이다.

저자 안씨는 ‘원 샷’ ‘매니아’ ‘스킨쉽’ ‘스태미너’ ‘신드롬’ ‘액션’ 등 습관적으로 자주 써 마치 우리말처럼 익숙하지만 정작 미국인은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외래어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런 영어를 가짜 영어, 반쪽짜리 영어, 튀기 영어, 쭉정이 영어라고 말한다.

의학의 이상증후군을 뜻하는 ‘신드롬’이 사회적인 이상열기로 너무나 자주 쓰이고, 난폭하거나 격렬한 정신장애라는 의미인 ‘매니아’가 특정 분야에 빠진 사람으로 통용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매니아의 올바른 영어 표현은 버프(buff)나 버그(bug)라고 한다.

일러스트(일러스트레이션), 언더(언더그라운드), 멘트(코멘트) 등 외국인들이 짐작도 할 수 없는 접미사나 접두사만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저자는 대중매체 종사자들이 잘못 만들어 쓰는 일본식 쓰레기 영어를 무분별하게 도입해 모방하고 잘못 사용하는 데서 이같은 현상이 빚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영어라고 착각하고 뿌듯해 하며 우리말을 거침없이 내다버리는 습관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 안정효 인터뷰

_150여권을 번역하고 이화여대 통역대학원에서 번역론을 가르치는 등 영어와 관련한 활동을 하면서 영어의 오·남용을 질타하는 책을 냈는데.

“‘안정효의 영어 길들이기’ 등 영어 관련 서적을 내면서 느낀 점 중의 하나가 많은 영어가 우리 생활과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에서 잘못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을 30분 정도 보다 보면 10개 이상 잘못 사용되는 영어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한국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면서 이상한 영어를 만들어 쓰며 외국어 실력을 과시하는 현상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4년 동안 대중매체를 보면서 잘못된 것을 적어 놓았다가 2년간 이 책을 집필했다.”

_특히 텔레비전이 영어 오·남용의 주범이라고 지적했는데.

“텔레비전은 일반인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이며 언어 생활에 직결된다. 이처럼 중요한 매체가 영어를 앞장 서 잘못 이끌고 있다. 텔레비전의 코미디를 비롯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잘못된 영어를 쓰는 것을 보면 한심하다 못해 화가 날 정도다. 왜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가?”

_요즘 우리 사회에 조기영어 교육 열풍을 비롯해 영어 공용화 주장까지 일고 있는데.

“조기 영어교육에 반대한다. 영어 공용화에 대해서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우선 우리 말을 잘 가르쳐야 한다. 영어보다 인성교육에 치중해야 한다. 영어를 배워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고 많은 사람들이 영어 배우는 것에만 혈안이 돼있다. 영어 과열은 영어 장사꾼들이 조장하는 면이 적지 않다. 세계화는 우리의 좋은 것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지, 영어만 잘 하는 것이 어떻게 세계화냐? 아이들도, 공무원도, 직장인도 영어 배우느라 시간을 다 쓰면 언제 자기 일의 전문성을 높여 나가고 우리나라 말은 언제 배우나?”

_학교 영어 교육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많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육부터 제대로 공부하자고 말하고 싶다. 좋은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방면의 지식을 축적해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_우리 언어 생활 중 가장 큰 문제와 대안은?

“우리 말을 무시하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다. 여론을 선도할 지식인이나 대중매체 종사자들에게 이런 의식은 더 심각하다. 영어 등 잘못된 외래어 사용을 자제하고 우리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말로 해야 한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