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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풍수논쟁을 밝힌 책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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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풍수논쟁을 밝힌 책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입력
2000.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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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때도 고려시대 못지않은 풍수논쟁이 벌어졌다. 조선의 새로운 도읍 후보지였던 개경, 계룡산, 한양, 무학(현 연세대 위치)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도읍지 논쟁, 태종의 묘 헌릉 뒤쪽에 고갯길을 막느냐 마느냐로 벌어진 30년간의 논쟁, 경복궁 명당 논쟁, 사도세자 묘 이장 논쟁 등이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풍수지리 논쟁들이었다. 그 뒤에는 하륜, 무학대사, 이양달, 최양선, 정인지, 윤선도 등의 풍수 학인들이 있었다.‘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궁리 발행)은 이들 조선시대 유명했던 풍수학인 24인의 생애와 논쟁을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한 문헌연구를 통해 밝힌 책이다. 풍수지리에 대한 문헌연구가 논문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매우 드문 상황에서 철전한 문헌조사 뿐 아니라 논쟁의 현장을 직접 답사, 저자 나름으로 그 진위를 평가한 의미있는 작업이다.

무학대사는 도선국사와 함께 천하의 명풍수로 알려져 그에 대한 숱한 민담과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성계에 의해 왕사로 책봉돼 한양 정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무학 자신이 직접 쓴 글이나 그의 제자들이 무학에 대해 쓴 글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야사’ 속의 무학과 달리 ‘정사’ 속 무학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추적해보면 한양 정도 과정에서 무학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한양정도의 주도적 인물은 당시 직업적 풍수관료였던 이양달이었다.

이러한 문헌 고증작업을 통해 저자는 전설과 민담 속에 가리워진 풍수지리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사술화(邪術化)되어 때론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며 학문과 미신사이를 방황하는 풍수지리의 본래적 모습을 복구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환경파괴 및 자연파괴에 대한 대안책을 풍수지리에서 얻을 가능성을 찾는다. 물론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시대 때 가장 활발했지만, 불행히도 고려시대때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실태를 파악할 길이 없는 상황. 대신 고려시대 못잖은 풍수논쟁이 일었던 조선 풍수의 모습을 추적했다.

이 작업을 통해 저자는 조선 풍수지리의 몇가지 특징을 정리한다. 고려시대 풍수가 자연 유기체적 관점에서 출발한 자연과 인간의 공생적 관계를 전제로 한 국역(國域) 풍수였던 반면, 조선 풍수는 좋은 땅에 조상의 유골을 모셔 발복(發福)을 바라는 음택풍수로 축소되었다. 반면에, 태조,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정조 등 변혁기와 왕조중흥기에 풍수지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등 조선 왕실의 풍수지리는 음택의 범위를 벗어난 일종의 통치의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조선 풍수는 이기론 풍수인 호순신(胡舜申)이론이 조선초기 하륜에 의해 도입된 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각종 술법이 결합해 술수화 경향이 짙어졌다고 본다.

‘민중성과 리얼리즘’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독문학자인 저자가 애초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풍수지리의 민중성 때문이었다. 명풍수 일이승(一耳僧)이 홍경래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풍수지리의 혁명성을 착안한 것. 하지만 저자는 “역사에 패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당시의 풍수사를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이를 뒷날의 일로 남겨두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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