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도폭’의 14번째 그림은 ‘지난부도(濟南府圖)’ 이다. 조선 사절이 닿은 산둥성의 성도(省都) 지난성(濟南城)을 그린 것이다. 지난을 상징하는 태산(泰山, 1532m), 치엔풔산(千佛山, 285m), 화부주산(華不注山, 화산, 197m)을 실경 대로 제자리(태산과 치엔풔산은 남쪽, 화산은 반대로 동북쪽)에 그리지 않고 화면 위쪽에 나란히 배열한 것은 산악을 돋보이게 한 전통적인 화법이다. 세 산의 묘사는 거리감이 거의 같아 원근법 이치에는 맞지 않으나 가장 높은 태산 만은 돌출하게 묘사해 입체감을 살렸다.‘역산서원(歷山書院)’, ‘백설루(白雪樓)’, ‘박돌천(___ 突泉)’등 세 구조물을 나란히 묘사했는데 이것은 실경 그대로이다. 홍익한은 “역산서원 서쪽 담장 밖에 백설루가 있고 누각 앞에 박돌천이 있다”고 했다. 역산서원은 명나라 만력(萬曆, 1573∼1619) 연간에 세운 지난성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백설루는 명나라의 저명한 문인 이반룡(李攀龍)을 기려 명나라 때의 섭몽웅(葉夢熊)이 박돌천 동쪽에 세웠다. 그 뒤 퇴락해 없어진 것을 1996년 ‘박돌천공원’ 안에 복원했다. 박돌천은 샘의 고장으로 불리는 지난의 이른바 ‘칠십이천(七十二泉)’ 중에서 가장 으뜸인 샘으로 2,600년 전에 펴낸 중국 역사서인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작년 가을 필자가 박돌천을 찾았을 때 샘의 못은 작은 파문조차 일지 않고 잠잠했다. 그렇다고 영영 죽은 샘이 된 것은 아니고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한다. 성안의 ‘순정(舜井)’은 그 옛날 순임금이 팠다는 전설의 우물인데 지금도 번화한 시내 큰길 가에 남아 있었다. 지명은 이름하여 ‘순징가(舜井街)’. 우물은 거의 말라버려 폐정(廢井)이 되고 몹시 더러웠다.
태산은 중국의 이른바 오악(五嶽)의 으뜸이다.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일컬어 태산의 신을 숭배하는 민간신앙도 천년의 긴 역사를 지닌다. 순례자는 본고장 산둥을 비롯해 허난(河南), 허베이(河北), 산시(山西), 산시(陝西), 안후이(安徽), 장수(江蘇), 둥베이(東北) 지방 등, 중·북부 중국의 전역에 이르며 그 열렬한 신앙 양태와 대규모의 군중 이동은 조선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사회현상이다.
조선사절들은 도중에 태산에 향을 올리러 가는 군중을 목격하고 본국에서 볼 수 없는 중국 땅의 특이한 신앙풍속을 짧은 글 속에 낱낱이 적고 있다. 그들의 엄청난 떼거리, 괴상한 모습, 특이한 행동거지는 좋은 볼거리이지만, 군중 동원의 엄청난 열기에 백성을 다스리는 관인(官人)인 조선사절들은 상당한 문화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즙은 1623년 10월 16일, 웨이현( 縣)에서 처음 그들과 만났다.
“노상에서 태산에 진향(進香)하러 가는 백성들을 만났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악대가 선두에 서고 뒤에는 깃발이 따른다.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고 잡스러웠다. 태산에 진향하는 가을에는 인근 4, 5개 성(省)의 백성들이 서로 앞다투어 산에 오른다. 그 숫자가 엄청나게 많아 관(官)에서는 통행료를 거두어 변방 군사의 군량미에 보태고 있는데 그 폐단이 적지 않다고 한다. 임술년(1622년)에 진향민(進香民)들이 집단반란을 일으켜 그 세력을 막기 어려웠는데 지금의 병부상서(兵部尙書 : 국방장관) 조언(趙彦)이 당시 산둥포정사(山東布政司 : 산둥의 지방장관. 종 2품 벼슬)로 잘 진압평정해서 상서로 진급했다고 한다.”
1622년 5월 11일, 산둥성 윈청현(___城縣)에서 서홍유(徐鴻儒)란 자가 종교 비밀결사인 백련교도(白蓮敎徒)와 농민 등 2,000여 명으로 반봉건 투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인근 지역을 점령하고 한때는 세력이 근10만 명으로 확대됐으나 10월, 산둥 순무(巡撫: 포정사보다 높은 지방 최고장관) 조언이 이를 진압하고 그 공으로 12월 병부상서가 됐다. 조즙은 바로 서홍유의 반란을 언급한 것이다. 신앙집단이 반체제운동의 기폭제 구실을 하는 것은 중국사의 하나의 기본원리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취재하면서 지나친 시골의 정거장마다 현대 중국의 반체제 종교집단인 이른바 ‘파룬궁(法輪功)’을 금지하는 공고문이 나붙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간종교 결사에 대해 당국이 얼마나 고심하는가를 알 수 있다.
홍익한의 1624년 9월29일자 일기. 이날 그는 지난을 출발, 북쪽 40리 지점인 치허현(齊河縣)에 닿았다. “수일 전부터 ‘태산진향(泰山進香)’이란 금자(金字)로 쓰인 딱지를 머리에 붙인 수백 명의 남녀노소가 길이 메이도록 떼를 지어 몰려가며 요란한 범패(梵唄)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조그만 가마, 금가마를 어깨낟 등에 메었는데 그 위에 작은 불상을 새겨 네 귀에 안치하고 색동으로 꾸며서 매우 정교했다. 장식한 깃대와 비단 깃발을 손에 받들고 풍악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괴상해서 물어보니 산시(山西)와 산둥의 풍속이 가을걷이 뒤에는 으레 태산에 향을 올려 복을 빈다고 한다.”
홍익한이 태산진향민을 목도한 것은 치허에 닿기 며칠 전, 아마도 지난에서부터 연거푸 본 것 같다. 홍익한은 그들의 차림새, 소지품, 일거일동을 참으로 치밀하게 묘사해 마치 한 폭의 정밀화처럼 꼼꼼하고 현장감이 넘친다.
신열도(申悅道)는 1628년 동지사(冬至使) 송극인(宋克____ )사절의 서장관(서장관 :서기관. 정식 외교관임)이다. 그는 이 해 10월 25일, 홍익한과 같은 장소인 치허에서 태산진향민을 만났다. “길에서 태산에 진향하러 가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 이마에 금부적을 붙이고 많게는 1,000여 명, 적게는 100여 명씩 떼지어 깃발을 앞세우고 수레가 뒤따르며(幢__ 前羅 ___ 蓋後隨) 거리에 가득하고 길을 꽈악 메워 주야로 끊이지 않는다. 하늘의 성모인 벽하진군(碧霞眞君)에게 복을 빈다고 한다. ‘幢_____ 前羅 ___ 蓋後隨’, 여덟 글자는 당나라의 저명한 문인인 유종원(柳宗元)의 명구를 옮긴 것인데 현장 설명에 그대로 딱 들어맞는다. 오윤겸 사절은 1622년 6월 경, 이경전 사절은 1623년 6,7월 경, 이 두 사절은 모두 여름철에 산둥지방을 지났기 때문에 가을철의 연중행사인 태산진향단의 이국적인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제남부도’의 주제는 태산진향 행렬도이다. 맨 앞사람은 징을 치고, 이어서 깃대와 일산(日傘)을 든 사람, 뒤에는 신상(神像)을 모신 가마가 따라간다. 향렬을 목격한 조선 사절들의 기록과 어쩌면 그렇게도 들어맞는가! 현실적인 주제, 정확한 고증, 정교한 묘사로 이뤄진 이 그림은 조선조 중기의 대표적인 실경화의 하나로 꼽힌다. 섬세한 필치로 보건대 뒷날 사행의 견문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재현 제작된 작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중국 현지에서 사생(寫生)된 것이 틀림없다. 그만큼 섬세함과 사실성이 탁월한 것이다. 이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홍익한 사행에는 반드시 솜씨 있는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 수행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연행도
관동대 박태근 객원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정간씨가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사고에서 찾아낸 조선중기 기록화 「연행도폭」(燕行圖幅)은 1624년 조선 인조의 왕권을 승인받기 위해 바다 건너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李德泂)·홍익한( 洪翼漢) 일행의 행적을 담은 국내 유일의 바닷길 연행 화첩입니다. 낙장이나 파본 하나 없는 25장의 그림은 평북 곽산군의 선사포(宣沙浦) 항을 떠나 베이징(北京)에 이르는 사절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조선 중기 회화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
/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 명지대· LG 연암문고 협찬
■[연행도기행] 舜 임금이 살았던 지난시(濟南市)
지난시(濟南市)는 산둥성의 성도(省都)로 산둥성 인민정부의 소재지이다. 산둥성의 정치·경제·문화·교통 중심지로 인구는 549만 2,000 명이다.
철도는 남북으로 수도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는 징후선(京___ 線), 동서로 칭다오(靑島)와 지난 사이의 쟈오지선(膠濟線)이 지난에서 교차한다.
기원전 22세기 경 순(舜)이 이곳에서 농사 짓다가 요(堯) 임금을 이어 왕이 됐다는 중국 굴지의 역사도시이다. 시내에는 역대 왕조의 유적이 많고 호수 대명호(大明湖), 샘 박돌천(__ 突泉), 절과 마애불상이 많은 천불산(千佛山, 치엔풔산)은 지난의 3대 명승지로 꼽는다.
조선사절이 내왕한 명나라 때는 지금의 성장(省長) 격인 지방장관으로 산둥 ‘포정사(布政使. 종2품 벼슬)’가 있었고 또 위에 산둥 순무(巡撫)가 주재했다. 말기에 랴오둥 전쟁이 치열해지자 관할 지역인 덩저우부에 또 하나의 고위관리인 「덩라이순무(登萊巡撫)」를 설치했다. 그러므로 산둥성에는 본래의 산둥 순무와 임시직인 덩라이 순무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오윤겸 사절(1622년)의 이경전과 조즙 사절(1623년)은 역산서원에 머물렀고 홍익한 사절은 성 남쪽의 정각사(正覺寺)에 머물렀다. 이경전의 경우 정사(正使)인데도 통역의 잘못으로 지난에 도착한 첫날 밤 역산서원에 들지 못하고 대문 밖에서 하루 밤을 지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을 찾은 조선사절들은 모두 지난의 역사와 명승지를 소상하게 적어 마치 역사기행문 같은 느낌을 준다. 홍익한은 젊은 서장관이라 숙소의 중 혜광(慧光)의 안내로 관광길에 올라 치엔풔산과 화산에 올랐고 또 순임금을 모신 순묘(舜廟), 순정(舜井), 역산서원, 백설루, 박돌 천등 명승지를 두루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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