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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특사교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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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특사교환 사례

입력
2000.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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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은 당국간 공식대화 창구가 막히거나 정상회담을 추진할 때마다 최고위층의 측근 인물을 통해 대화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상 공개된 특사(Special envoy)보다는 밀사(Emissary)가 최고위층의 의중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유용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남북한 밀사 교환은 1972년 5월 2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 김일성 주석을 두차례 면담함으로써 처음 시작됐다. 이어 북한의 박성철 당시 부주석이 같은 달 29일 서울을 방문하는 등 막후접촉을 통해 남북은 역사적인‘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5공때는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 담 노동당 중앙위원회비서가 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밀사역을 맡았다.

85년 9월5일 허비서는 “각하(전두환 당시 대통령)와의 평양 상봉이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는 김주석의 친서를 갖고 서울을 방문했으며 두달 뒤 답방으로 장부장과 박철언 당시 청와대 보좌관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으나 정상회담 성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노태우 정부 때는 박철언씨가 ‘북방밀사’로서 활동했다.

남북간에 밀사가 아닌 특사의 교환이 논의된 것은 김영삼 정부시절인93년 북한핵위기 때.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고위급 회담 대표접촉을 갖자는우리측 제의에 북한이 남북 정상만남과 현안해결을 위한 특사 교환을 역제의,

93년 10월5일부터 94년 3월19일까지 8차례나 판문점 평화의 집과 통일각을 번갈아 오가며 실무접촉이 진행됐다. 그러나 북한의 박영수 대표단장이 8차 회담도중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발언, 특사교환은 무산됐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98년 2월 취임식때 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해 특사를 교환할 것을 북한측에 촉구했으나 북한측은 아직까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김승일기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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