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일 너 혼자 다하냐’라는 친구의 푸념을 뒤로 하고 전화를 내려놓으며 나와 세상이 단절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2000년 해외 신제품 런칭이 상반기에 몰려있는 탓에 머리속은 24시간 내내 각종 구상으로 꽉 차 있다. 피로감이 들 때면 몸을 가볍게 움직일 겸 창문아래를 내려다보곤 한다.
늦은 시간에도 어디론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차들을 바라보다, 나도 어디론가 열심히 향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일을 손에 잡는다.
대학 4학년때 군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특채나 서류전형 등에서 제외되는 일을 겪을 때만 해도 나 자신의 도전의식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었다. 막상 어렵게 수천명 중 몇 십명에 해당되는 여성합격자가 되었을 때 내가 기억하는 선배들 조언의 대부분은 ‘튀지말고 인간관계를 원만히 하라’는 내용이었을 뿐 겉치레라도 ‘조직에 기여해 주길 바란다’는 말은 없었다.
여자의 능력에 대한 불신감은 내 머리 속에도 고착돼 나를 주눅들게 하곤 했다. 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회사생활의 중장기 로드맵을 그려 커리어를 관리해 나가고자 했다. 내가 맡은 업무에 탄력이 붙을 때면 그동안 다져놓은 기반에 연연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부서를 옮길 기회를 찾아 나섰다. 덕분에 기획, 해외영업, 마케팅, 해외지역전문가과정 등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경험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나를 차별화하고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다.
흔히들 여성들은 불확실한 상황에 대해 두려움이 큰 반면 남성들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성취하는 것을 즐긴다고들 한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볼 때 자신의 영역에 대한 미련이 많고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은 남녀공통된 본능의 문제인 것 같다.
여성이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런 환경에 많이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일 뿐 근본적인 능력의 차이는 아니라는 것을 현장에서 체험했다. ‘최근의 전문직여성 증가는 계속되는 사회 불평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아이러니’라는 내용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능력이 있다면 전문직에서 뛴다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다만 더 많은 후배들이 서로 부딪치는 조직에 뛰어들어 정착해 나감으로써 ‘여성은 조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기존의 인식을 불식시켜 나가기를 기대한다.
/김기선·삼성전자 디지털영상 사업부 과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