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색 21] 16. 의회에서 민회로-전자 민주주의의 시대민주주의(데모크라티아)의 어원적 의미가 「인민의 지배」라면, 그것의 본디 모습은 정치 공동체의 의사 결정 과정에 구성원 모두가 직접 참가하는 직접민주주의일 것이다. 비록 여성과 노예를 제외한 자유민 남자들만의 민주주의이기는 했지만,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특히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그런 민주주의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그 민주주의는 대의제에 기초한 18세기 이후의 근대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오늘날 스위스와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의 일부 주(州)를 제외하면 아테네식의 직접민주주의를 비슷하게나마 실천하고 있는 곳은 찾아내기 어렵다. 그러니까 직접민주주의는 과거의 민주주의, 아스라한 고대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그 미래의 직접민주주의는 전자민주주의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유럽에서 절대 군주들이 통일 국가를 형성한 뒤에, 그 절대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자유주의적 요청과 맞물려 나타났다. 그런데 근대 국가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그리고 복잡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아테네식의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제약조건들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나타난 것이 대의민주주의, 곧 의회정치다.
민주주의는 그 정치과정에 주민집단 전부를 직접 참여시키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그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주민들을 대신하여 정치에 참여할 기관으로서 의회를 구성하고 그 의회에 주권을 맡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대의민주주의는 서세동점(西勢東占)의 흐름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이 투표를 통해서 권력을 대표자들에게 잠정적으로 맡기는 방식이어서, 시민이 대표자들의 행동 속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찾아낼 수 없으면 양자 사이의 신뢰 관계는 위태롭게 된다. 총선 시민 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은 한국에서 시민과 대표자들 사이의 신뢰 관계가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증거다. 의회 주권의 의지가 인민 주권의 의지를 배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상 대의제는 시민의 인격과 의회의 인격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다는 데서 처음부터 왜곡될 소지를 지니고 있었다. 유권자는 몇 년에 한번씩 자신의 대표를 의회에 보내는 선거를 통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지만, 그 이후에는 이들 대표가 모든 결정을 내린다. 유권자들은 다음 선거까지는 자신들의 대표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국민이 그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투표일(投票日) 뿐이다. 전면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직접민주주의의 도입을 모색할 필요는 여기서 제기된다.
21세기의 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 형태에 가까워질 가능성은 꽤 크다. 무엇보다도, 근대 이후 직접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기술적 제약이 극복되었다.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통신기술이 시공간을 비약적으로 압축시키고 정보처리 능력을 혁명적으로 늘림에 따라, 넓은 영토나 많은 인구, 복잡한 정부 기능 같은 것이 이제 더이상 직접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인터넷이 상징하는 메시지의 쌍방향성은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21세기에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사이버 공간의 등장이고, 이 새로운 직접민주주의는 전자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전자민주주의는 전자 투표만이 아니라 이미 다반사가 되고 있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치 토론이나 여론 조사까지를 포함한다. 고대 아테네의 민회 장소였던 아고라가 사이버 공간 안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의민주주의에서 직접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의회에서 민회로의 이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낙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전자 직접민주주의는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전자 감시사회의 전단계일 수도 있다. 정보의 채널이나 정보 자체가 독점되지 않도록 법률적·기술적 장치를 세심히 만드는 것은 그래서 전자 직접민주주의의 선결과제라고 할 수 있다. 프라이버시와 공정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것, 다시 말해서 전자투표가 비밀투표가 되도록 정보가 흘러들어가는 과정을 모두 암호화하면서도 그 결과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도 전자민주주의의 기술적 전제다.
또 전자민주주의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시티즌」이 「네티즌」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그러니까 전자민주주의가 코앞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의 정보 사회는 정치 과정에 대한 시민들의 앎의 욕구를 키울 것이고, 그 욕구는 전자 직접민주주의로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정보통신 혁명이 기술적으로 직접민주주의를 가능케 하고 있다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나타난 정치의 「사소화」는 직접민주주의의 상황적 토양을 일구고 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브라이언 비덤은 공산주의와 다원주의 사이의 싸움이 끝난 뒤 선거의 쟁점은 체제나 이데올로기 같은 원칙의 문제에서 공적 지출의 규모나 방향 같은 비교적 자잘한 사안들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대사상(大思想)들 사이의 싸움이 끝나면서 새로운 정치는 지루한 세부 항목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정치 세계의 해적(海賊)이라고 할 수 있는 로비스트들에게는 이상적인 환경이다. 원칙의 문제가 정치나 선거의 쟁점이 아니므로, 예전보다 로비가 먹혀들기 쉽게 된 것이다. 또 선진국에서의 부(富)의 증가와 정보기술의 발전도 로비스트들에게는 유리한 조건이다. 특정 이익집단을 위해 정부와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비스트들은 전보다 더 많은 돈을 주무르면서 최신 통신 장비로 「대표들」을 설득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가 부패할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반 유권자들도 로비스트나 선동가들에게 매수당하거나 기만당할 수 있지만, 소수보다는 다수를 기만하거나 매수하기가 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유권자들과 그들이 선출한 대표 사이에 부(富)와 교육의 정도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 때문에 더 그렇다. 게다가 어떤 사회에서든 「대표」가 실제적으로 모든 형태의 그룹을 대표하고 있지는 못하므로, 직접 민주주의의 도입은 하나의 추세가 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해서 가장 완강히 저항할 세력은 정당일 것이다. 직접민주제가 도입되면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 사항은 국민 투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거와 의회의 중요성은 감소하게 될 것이고, 자연히 선거와 의회를 떠받치고 있는 정당들은 할 일을 크게 잃을 것이다. 실상 이상적인 전자 직접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의회가 없어지고 모든 국민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직접투표로 정치적 의제를 설정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 그런 상황이 실현되리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정치공동체의 모든 결정들에 모든 시민들이 참가하는 것은 시민들로서도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니, 전자 직접민주주의가 시행되어도 의회는 여전히 있을 것이고 따라서 정당도 존재할 것이다. 그것들이 과거의 권위는 크게 상실하겠지만.
근대 민주주의의 직접민주주의 요소들
미국의 식민지 시대와 건국 초기에는 타운미팅(주민총회)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타운미팅은 선거권을 가지는 전 주민이 직접 참가해 예산안의 확정, 공무원과 학교 이사의 선출, 조례 제정 등의 주요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표결하는, 타운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다. 오늘날에도 타운미팅이 형식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시장(市長)이나 상설 대의기관이 타운미팅을 대체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 제도로는 크게 국민투표, 국민 소환, 국민 발안 세 가지가 꼽힌다. 국민투표제(Referendum)는 헌법 개정안을 비롯해 중요한 국사(國事)를 국민의 표결에 붙여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제도다. 특히 왕정의 부활이나 폐지, 영토의 변경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특정 사건과 관련된 국민투표는 플레비시트(Plebiscite)라고 한다. 국민투표제는 예컨대 스위스처럼 광범위한 사안에 대해 그것을 자주 시행하는 직접민주주의 지향의 국가가 아니더라도 세계에 널리 채택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 제도다.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은 국회가 의결한 헌법 개정안을 30일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붙여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하도록(130조 2항) 규정하고 있다. 또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 투표에 붙일 수 있다(72조).
국민소환제(Recall)는 선거로 선출된 대표 가운데 유권자들이 부적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임기가 끝나기 전에 국민 투표로 파면시키는 제도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되어 오늘날에는 스위스의 몇 개 캔턴(州)과, 일본의 지방 자치 단체 등에서 채택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채택된 적이 없다. 국민발안제(Initiative)는 국민이 직접 헌법 개정안이나 중요한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다. 스위스의 캔턴이나 미국의 일부 주에서 실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62년 5차 개헌에서,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명 이상의 찬성으로 헌법 개정을 제안할 수 있게 하는 국민발안제가 채택되었지만, 72년의 제7차 개헌(유신헌법)에서 폐지되었다.
직접민주주의의 현장. 스위스에서는 캔턴(州)별로 유권자 전원이 야회에 모여서 민회를 연다. 1963년 니드발주의 한 민회 장면. 당시는 여성참정권이 보장돼 있지 않아 남자만 보인다.
새로운 세기의 직접민주주의는 전자민주주의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1996년에 사이버공간에 창립된 가상 정당 「사이버 파티」 홈페이지(http://cyberparty.or.kr)의 초기 화면.
사이버 정치증권 포스닥(http://posdaq.co.kr)의 초기 화면.
스위스에서 국민투표는 일상적이라고 할만큼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실시된다. 1992년 12월에 실시된 유럽경제지역(EEA) 참여 여부 결정에 대한 국민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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