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해방운동은 민주주의 운동의 본질적 부분이다. 민주주의가 인권의 보장과 확대를 알맹이로 삼는다면, 그것은 당연히 여권의 보장과 확대를 핵심적 가치로 추구할 것이다. 민주주의 역사의 커다란 봉우리인 프랑스 대혁명이 여성해방운동의 새로운 기원이 된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혁명의 와중에 ‘여성 공민권의 승인에 대하여’라는 팸플릿을 쓴 여성 연극인 마리 올랭프 드 구주는 로베스 피에르와의 불화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 오를 권리도 있다”고 외쳤고, 바로 그 시기에 도버 해협 건너편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혁명의 진행 상황에 귀를 기울이며 여권론의 고전이라고 할 ‘여성의 권리 옹호’를 썼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참정권의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법적 차별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여성은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법적, 제도적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 가톨릭 성직의 서품 금지에서부터 직장에서의 성적 모욕에 이르기까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우는 기다란 목록을 이룬다.1997년 여름호로 창간된 계간지 ‘이프’는 올랭프 드 구주와 울스턴크래프트의 후예들이 만드는 잡지다. 이 잡지는 그 제호 앞에 ‘페미니스트 저널’이라고 자신의 성격을 분명히 못박고 있다. 잡지 측의 설명에 따르면 제호 ‘이프’는 페미니스트들이 ‘만약에(if)…’라고 가정해 본 세상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이 잡지가 추구하는 페미니즘이 완결된 어떤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발전하는 부정형(不定形)의 페미니즘(infinite feminism)이라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고, 또 I’m a feminist나 I’m a female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잡지의 창간호는 ‘Female Gaze’난에 그 ‘만약에’를 주제로 한 사진 두 편을 싣고 있다. 첫번째 사진은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 조각가 한애규씨의 작품 ‘지모신(地母神)’을 합성한 것이고, 두번째 사진은 신문사 전광판에 “여자들이여 웃자! 뒤집자! 놀자!”라는 구호가 커다란 글씨로 떠오른 장면을 보여준다. 실상 “웃자! 뒤집자! 놀자!”는 ‘이프’의 모토(이 잡지의 표현에 따르면 if spirit)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려왔으니 이제는 폭발하는 침묵처럼 웃어야 하고, 그 동안의 억눌린 욕망을 발산하며 이 세상을 한번 신나게 뒤집어버려야 하며, 지금까지 노예의 평안에 중독된 채 희생의 학습에 몰두했으니 이제는 재미있게 놀아보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웃음, 혁명, 놀이, 이 세 가지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프’는 여성해방운동을 이론적으로 다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 단정한 이론 속에 안주하기에는 이 잡지를 만드는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활기차고 실천적이다. 이 잡지는 논문으로 이뤄지는 잡지가 아니라 기사로 이뤄지는 잡지다. 창간호는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이라는 특집 아래 영화·방송·언론·미술·문학계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성희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한편, 문학작품 속의 남근(男根)중심주의를 살폈다. 우리 사회의 공적 담론의 장에서는 금기시돼 온 여성의 자위행위를 긍정적 맥락에서 거론한 것도 인상적이다. ‘이프’의 어떤 기사들은 성적(性的)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매우 도발적으로 보일 것이다. 이 잡지는 1998년 겨울호에서도 ‘오르가즘을 찾아서’라는 특집을 통해서 여성이 섹스의 수동적 파트너에서 벗어나 성애의 쾌락을 능동적으로 소비하는 주체가 되라고 격려했다. ‘이프’는 성(性)의 해방을 여성 해방의 중요한 측면으로 보는 것 같다.
지금까지 ‘이프’가 다뤄온 주제와 소재들을 일별하면 이 잡지가 꿈꾸는 세상(잡지의 제호가 뜻하듯 ‘만약에…’라고 가정해 본 세상)의 그림이 그려진다. 그 세상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일 것이다.
“만약에 제사가 없어진다면… 만약에 육아가 남성의 몫이라면… 만약에 여자들이 남자접대부들의 시중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면… 만약에 호주제가 폐지된다면… 만약에 사람들이 부모의 성을 함께 쓴다면… 만약에 70대 여성이 90대 남편을 상대로 낸 이혼소송에서 이길 수 있다면… 만약에 엄앵란씨의 얼굴이 브라운관에 그만 비친다면… 만약에 민주노총의 세계 노동절 기념 포스터에 여성노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만약에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면…”
물론 그런 세상이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프’는 그런 세상을 만들려는 힘겹고 장구한_한편으로는 신나는_노력의 한 도전적 표현으로 기록될 것이다.
■창간사
페미니즘은 여성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여성에게 줌으로써 양성 관계의 변혁을 목적으로 한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인간의 잠재성을 실현할 기회를 더욱 많이 가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단순한 이념이나 사상을 넘어선다. 그것은 남녀관계의 변화를 통해 세계를 변혁하려는 사회이론이며 동시에 정치적 실천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며 바람직하다고 인정되는 많은 것에 도전한다… 여성은 오랜 세월 동안 남성 욕망과 남성 쾌락의 대상에 불과했다. 이제 여성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IF는 페미니스트 저널이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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