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언 지음 '한국의 집 지킴이'어릴 적 부엌 문설주에 매어달려 있던 복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면 한밤중에도 “복조리 사려어”를 외치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던 복조리 장수의 구성진 목소리도 함께 떠오를지 모른다. 이 복조리는 ‘복을 건진다’는 희구를 담은 우리네의 ‘집지킴이’ 중 하나였다.
농촌의 너른 들 한복판에도 볼썽사납게 20층짜리 고층아파트가 들어설 정도로 급변해 온 우리 주거문화. 차가운 콘크리트 벽으로 칸칸이 질러진 아파트에서 자고새는 일상, 디지털이 그 집안을 뒤덮고 흐르는 피처럼 되어버린 시대에 이런 집지킴이들이 들어설 틈은 없다. 불과 20-30년의 도시화로 누천년을 이어 온 한국의 집지킴이들은 완전히 설 땅을 잃고 말았다.
민속학자 김광언(金光彦·61·인하대 사대) 교수의 ‘한국의 집지킴이’는 이렇게 사라져가고 있는 집지킴이를 종합적으로 다룬 최초의 단행본이다. 집지킴이에 대한 단편적 보고서나 논문은 있었지만 체계적으로 그 의미와 역사, 아직도 남아있는 흔적들의 화보를 충실하게 엮은 책은 없었다.
“우리 옛 분네들은 우주에 온 누리를 관장하는 하느님이 계시듯, 집에도 집을 돌보아주는 지킴이가 있다고 믿었다.”고대신화나 여러 종교에는 하늘과 땅, 산과 바다, 그리고 나무와 바위에 각각 신들이 깃들어 있다. 우리네 집에도 어디에나 이런 신들이 깃들어 집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신과 인간이 공존해온 작은 우주, 이것이 우리네 집이다.”
집 전체를 관장하는 성주, 터에는 터주, 문에는 문신, 부엌에는 조왕이 있었다. 우물에는 용신(龍神)이 있으며, 어린 목숨을 돌보는 삼신(할머니)이 있었고, 재운(財運)을 맡은 업, 자손의 복을 빌어주는 조상신이 있었다. 방, 마루, 마당, 장독대, 곳간에도 있었고 뒷간에는 뒷간신(厠神), 지붕에는 바래기 기와가 망을 보았다.
김교수의 저작은 15개 항목에 걸쳐 이런 집지킴이들을 다루고 ‘집들이’의 의미와,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의 집지킴이만이 가진 의미도 자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생생한 현장의 모습 풍속을 보여주는 한편 자연스럽게 고금의 문헌 기록들을 종횡하면서, 구수한 우리 속담과 수많은 옛말을 재현하고 그 의미를 설명해주는 글을 읽는 맛도 크다.
우리 어머니들이 없는 살림에도 부엌에 따로 쌀을 담는 자그마한 옹기를 놓아두고 밥을 지을 때마다 한줌이나마 따로 거기다 넣어두었던 것은 성주와 업을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쌀이 떨어지면 성주에게 “쌀 꾸어갑니다”라고 중얼거리며 쌀을 퍼냈다. 어머니들이 부뚜막 뒷벽 한가운데 턱에 작은 종지를 놓고 거기다 새벽마다 우물에서 길어온 깨끗한 물을 갈아 부었던 것은 부엌지킴이 조왕(조왕각시, 조왕할매)에게 온 가족의 평안과 행복을 빌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날마다 새로운 생명의 재탄생을 상징하는, 우주의 순환원리가 부뚜막에서 체현된 것이기도 했다.
김교수는 이번 저작에서 ‘집지킴이’라는 순 우리말을 썼지만 민속학계에서 이는 ‘가신(家神)’이란 한자어로 통한다. 그는 우리 겨레가 이 땅에서 집을 짓고 붙박이 삶을 시작한 6,000여년 전부터 집지킴이들이 함께 해왔다고 한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그 앞의 어머니 그리고 태고 적의 할머니들이 받들어왔던 지킴이들”이다.
이 지킴이들이 왜 하루아침에 우리 집에서 쫓겨나는 괴변이 벌어졌는가. 김교수는 가장 큰 원인을 일제의 식민지교육으로 꼽았다. 일제는 틈만 나면 우리 문화에 ‘미개’와 ‘미신’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1945년 당시 10만 6,000여 개나 되던 신사(神社)가 있던 일본은 미신과 미개의 덩어리가 아닌가.”
이런 식민지교육에 세뇌됐던 1970년대 근대화 추진 관료들은 우리 전통문화를 앞장서서 하루아침에 뭉개버렸다. 외래종교의 영향도 컸다. 유교의 관혼상제례에 젖어 맥이 끊길뻔 했지만 그나마 집안의 아낙네들에 의해 지켜지던 집지킴신앙은 20세기 기독교신앙에 의해 그 뿌리가 흔들렸다고 김교수는 말한다. 역시 ‘미신과 우상’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졌다. 김교수는 “문화와 신앙은 다르다”고 역설한다. 집지킴이는 바로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것이다.
“옛적의 집지킴이를 되살리자는 것은 아니다. 그 자취를 돌아보고자 할 뿐이다. 우리 가정과 강토를 지켜 온 어머니들이 간직했던 소망을 기억만이라도 해두자는 것이다”라며 “옛적의 지킴이들 대신, 우리네 집과 마음에 어떤 것이 들어앉았는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고 김교수는 말했다.
이 책은 ‘한국의 옛집’ ‘한국의 주거민속지’ ‘한국의 부엌’등에 이은 우리네 집에 관한 그의 여섯번째 저작이다. 책에 실린 200여 컷의 흑백·컬러 사진은 서너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옛집들을 찾아다니면서 직접 찍은 것들. 그는 이어 ‘한국의 뒷간’ ‘한국의 굴뚝’ ‘한·중·일 세 나라의 주거민속’을 써서 집에 관한 저술을 마감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집 지킴이
김광언 지음·다락방 발행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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