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드문 소극(笑劇)이었다. 세계인들은 4일 아침(현지시간) 전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84)가 멀쩡한 모습으로 TV에 나타나자 눈을 씻어야 했다. ‘건강악화’를 이유로 풀려나 고국에 돌아온 피노체트는 더이상 죽을 날을 기다리는 쇠잔한 노인이 아니었다.그는 공항에 영접나온 친척들과 군 장성들을 포옹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걷기 시작했다. 군악대가 자신이 좋아하던 행진곡을 연주하자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과거에는 몸을 무겁게 의지하는데만 썼던 지팡이를 공중으로 내둘렀다. 24시간이나 여행을 했음에도 피로한 기색은 찾을수 없었다.
“당신과 함께”라며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뒤로한 채 산티아고 국군병원으로 직행한 피노체트는 입원하지 않았다. 검진한지 9시간도 못돼 퇴원, 완전무장한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티아고 외곽의 저택으로 향했다. 병원 밖에선 3,000여명의 ‘피노체트의 팬’들은 석방 축하파티를 열었다. 이날밤 피노체트는 안데스산맥이 연출하는 풍광에 취한채 지난 16개월간의 ‘고난’을 삭였을 것이다.
이날 사건은 결코 해프닝이 아니었다. 노회한 독재자의 속임수에 전세계가 조롱당했거나, 영국정부 등 ‘인권 선진국’들의 외교적 술수를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영국 선데이 미러지는 그가 자격을 갖춘 정신과의사의 검진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폭로했다. 그의 재임시절 고문으로 희생당한 피해자 가족들과 인권단체들은 땅을 치며 통탄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이날 ‘평생 상원’인 피노체트의 버팀목인 면책특권에 대한 취소 청원이 접수되고 이미 60건의 소송이 기다리고 있지만 ‘응당한 처벌’은 지난해 보인다. 면책특권이 취소되면 법원의 체포 명령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유혈을 감내해야 집행할 수 있는 상황이다.
최근 칠레 언론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45%가 피노체트 소추를 찬성했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44%나 됐다. 피노체트는 결국 ‘화해’의 이름으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듯 싶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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